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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백련사 날짜 : 2012-06-21 (목) 13:15 조회 : 2522

업(業)


업(業)이라는 말은 불교인만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말이다. 특히 예로부터 윤리적인 규범들과 결부하여 좋은 일은 권장하고 나쁜 일은 못하게 막는 근거로서 업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여 왔다. 또한 복을 짓는다는 말이 좋은 행동을 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것과는 반대로 업을 짓는다는 말은 나쁜 행동을 한다, 즉 죄를 짓는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한편 다른 종교에서 현세에서 신을 믿는가 안 믿는가에 따라 자신의 내세가 결정된다고 말하는 것도 일종의 업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업 사상은 순수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부터 인도의 여러 사상에 널리 퍼져 있었다. 업은 산스크리트어 까르마(karma)를 번역한 말로 ‘무엇을 짓다’ 혹은 ‘만들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업이란 본래 행동 혹은 행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지 선과 악에 대한 의미는 포함되어 있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은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렇지 않으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든 간에 그 행위가 다른 것 혹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바꾸어 말하면 업이라는 말에는 반드시 원인과 결과가 따르고 한 가지 행동이 다른 행동을 일으키는 원인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것에 의해 일어난 결과가 될 수 있는 양면성을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어떤 행위의 원인이 되는 행위가 선한 것인가 아니면 악한 것인가에 따라 그 결과로서 복을 받거나 죄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는 행위를 업이라 부르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과보(果報) 또는 업보(業報)라는 말을 쓴다.

이와 같은 업은 몸으로 짓는 업[身業], 입으로 짓는 업[口業], 그리고 마음으로 짓는 업[意業]의 세 종류로 구분하고 이를 삼업(三業)이라 한다. 몸으로 짓는 업은 육신의 움직임으로, 그리고 입으로 짓는 업은 말에 의해 짓는 행위를 말한다. 그리고 마음으로 짓는 업이란 정신적 활동, 즉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이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마음으로 짓는 업인데 그것이 표면에 나타나 다른 것에 직접 영향을 미치든 아니면 그저 마음 속에만 품고 있든 간에 모두 마음으로 짓는 업에 속한다. 또한 공업(共業)이란 말은 같은 무리의 사람들이 같은 행위를 하고 그 과보도 함께 받는 것을 말한다.

한편 『천수경』의 「참회게」에서는 우리가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악업은 탐욕[貪], 증오[嗔], 어리석음[癡] 등의 삼독(三毒)이 그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으며 「십악참회게」에서는 열 가지 종류의 악업과 그에 대한 참회를 나열하고 있다.

◎ 십악참회(十惡懺悔)
살생중죄 금일참회(殺生重罪今日懺悔) 투도중죄 금일참회(偸盜重罪今日懺悔)
사음중죄 금일참회(邪淫重罪今日懺悔) 망어중죄 금일참회(妄語重罪今日懺悔)
기어중죄 금일참회(綺語重罪今日懺悔) 양설중죄 금일참회(兩舌重罪今日懺悔)
악구중죄 금일참회(惡口重罪今日懺悔) 탐애중죄 금일참회(貪愛重罪今日懺悔)
진에중죄 금일참회(瞋等重罪今日懺悔) 치암중죄 금일참회(痴暗重罪今日懺悔)

◎참회게(懺悔偈)
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 개유무시탐진치(皆由無始貪瞋癡)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 일체아금개참회(一切我今皆懺悔)

◎참회진언(懺悔眞言)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

윤회
윤회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세계를 포함한 여섯 개의 세계[六道], 즉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세계를 끝없이 죽고 태어나면서 돌고 도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우리의 마음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세 가지의 세계[三界], 즉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로 나누어진 선정의 단계를 말한다.

첫 번째 육도 윤회는 현생에서 우리가 짓는 업에 따라 내생의 세계가 정해지는 것으로 선업을 쌓고 바른 수행을 통해 다음에 보다 나은 세계에 태어날 수 있으며 그와 반대로 악업으로 인해 더 고통스러운 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업이야말로 윤회의 원동력인 것이다. 한편 어떤 종교에서는 천상의 세계에는 신과 같은 존재들이 머무는 곳으로 내생에 그 곳에 태어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불교는 천상의 세계도 윤회에 포함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천상이나 극락이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뛰어넘어야 할 하나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두 번째의 삼계 윤회는 육도를 다시 세 가지의 세계로 분류한 것인데 욕계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그리고 서른 세 개의 천상세계 중 일부로 물건과 잠을 탐하고, 음란한 생각이 가득한 우리 중생의 일상적 의식 상태를 말한다. 색계는 욕계에 속하는 천상의 세계보다 위에 있는 일부의 세계를 말하고 선정에 의해 욕망은 제거되었지만 육신과 같은 물질이 아직 남아 있어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무색계는 삼십삼천 중에서 가장 높은 단계에 있는 네 개의 천상 세계에 해당되며 이 단계는 육신의 굴레마저도 완전히 뛰어 넘은 자유자재한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수행에 따라 더 높은 세계로 갈 수도 있고 번뇌와 망상에 의해 낮은 단계의 세계로 떨어질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우리가 불교의 윤회설을 공부할 때 반드시 염두해야 할 가르침으로 무기설(無記說)이 있다. 무기설이란 부처님께서 존재의 본질에 관한 네 가지 질문에 대해 침묵으로 그 답을 대신하신 것을 말한다.

그 네 가지 질문이란 첫째, 세계는 시간적으로 무한한가, 유한한가? 일부는 무한이면서도 다른 일부는 유한인가, 알 수 없는 것인가. 둘째, 세계는 공간적으로 보아 무한한가, 유한한가? 일부는 무한이면서도 다른 일부는 유한인가, 알 수 없는 것인가. 셋째, 영혼과 육체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일부는 같으면서도 다른 일부는 다른 것인가, 알 수 없는 것인가. 넷째, 여래는 죽은 후에 존속하는가, 존속하지 않는가, 일부는 존속하고 다른 일부는 존속하지 않는 것인가, 알 수 없는 것인가 이다.

부처님은 이러한 질문들 자체가 중생의 고통을 제거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에 부처님은 독화살에 맞은 사람의 비유를 들어 직접적인 답을 피하셨던 것이다. 이를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부처님이 사밧티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 말룽캬라는 존자가 부처님께 여쭙기를 “세계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한한 것인가 유한한 것인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 것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아니면 마침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는가?”라고 질문을 했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만약 부처님이 나를 위해 세계는 영원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를 따라 도를 배우지 않겠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문제를 풀지도 못한 채 도중에 목숨을 마치고 말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받을 때 그 친족들은 곧 의사를 부르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되오. 나는 먼저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야겠소.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떤 신분인지를 알아야겠소. 그리고 그 활이 뽕나무로 되었는지 물푸레나무로 되었는지, 화살은 보통 나무로 되었는지 대나무로 되었는지를 알아야겠소. 또 화살 깃이 매의 털로 되었는지 독수리 털로 되었는지 아니면 닭털로 되었는지를 먼저 알아야겠소.’ 이와 같이 말한다면 그는 그것을 알기도 전에 온 몸에 독이 번져 죽고 말 것이다.
세계가 영원하다거나 무상하다는 이 소견 때문에 나를 따라 수행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세계가 영원하다거나 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생노병사와 근심 걱정은 있다. 또 나는 세상이 무한하다거나 유한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치와 법에 맞지 않으며, 수행이 아니므로 지혜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고, 열반의 길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한결같이 말하는 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이다. 어째서 내가 이것을 한결같이 말하는가 하면, 이치에 맞고 법에 맞으며 수행인 동시에 지혜와 깨달음의 길이며 열반의 길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이렇게 알고 배워야 한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말룽캬를 비롯하여 여러 비구들은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했다.
『중아함경』 「전유경」

실제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해서는 현대 과학도 결정적인 답을 줄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불교는 죽은 후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그것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가 아니다. 따라서 불교의 윤회설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또는 우리 마음의 세계를 보다 더 바르게 알고 깨닫는 데 초점을 맞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든 물질적인 것들과 정신적인 것들은 매순간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 부처님은 이러한 것을 무상이라고 했다. ‘나’라는 존재 역시 이 무상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마음과 몸도 삶과 죽음의 끝없는 윤회의 바퀴를 돌고 있다고 하겠다.

인과
앞에서 윤회는 업을 그 원동력으로 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또한 업은 원인과 결과라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음을 살펴보았다. 이와 같이 원인과 결과는 업과 윤회를 설명하는 데 가장 기본이 된다.

나아가서 원인과 결과 즉 인과(因果)는 업과 윤회를 설명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실상을 바르게 알 수 있는 핵심이 되는 원리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서로서로 의지하여 원인이 되기도 하고 결과가 되기도 하기에 그 인과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곧 존재의 실상을 바르게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존재의 실상을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을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한다.

우리가 한 사물을 보고 그것이 책상인지 의자인지 아는 것을 분별(分別)이라고 할 때 분별작용에는 반드시 분별하는 주체와 분별되는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서로 의지하여 일어난 결과가 우리의 분별인 것이다. 즉 똑같은 강이라 하더라도 사람에게는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강으로 보이고, 지옥의 죄인들에게는 불의 강으로, 그리고 아귀들에게는 피, 고름, 오물이 가득한 강으로 보이는 것과 같이 비록 같은 대상이라 하더라도 우리 중생들에게는 각자의 근기에 연(緣)하여 서로 다른 분별 작용이 일어난다(起).

따라서 불교는 연기법으로 존재의 실상을 바라보기에 우리가 분별하는 모든 존재는 허망하고 무상한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연기법은 일상생활의 마음가짐으로부터 부처님의 법을 수행하는 마음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마음이 일어나는 이치를 일깨워 주어 아집과 편견에서 비롯되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바르게 세상을 볼 수 있는 길로 이끌어 주는 가르침이다.

한편 흔히 우리는 우리가 지은 선업과 악업의 과보는 과연 언제 받는가 하는 의문을 한 번씩은 가져 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주위에는 나쁜 일을 하고도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착한 일만 하는데도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해 원인이 발생하고 과보가 일어나기까지의 시간에 대해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두 손바닥을 치는 그 즉시 소리가 나듯이 원인이 발생한 다음 순간 곧바로 결과가 일어나는 경우이다. 둘째는 원인이 발생하고 나서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그에 대한 결과가 일어나는 것으로 꾸준히 공부한 결과 시험에 합격한다든지 직장 내에서 자신이 맡은 책임을 꾸준히 다한 결과 승진을 한다든지 하는 경우를 말한다. 셋째는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결과가 발생하는 것으로 태어나고, 늙고, 죽는 것 혹은 우리가 참선 수행을 할 때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고 한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경우가 그 예이다. 마지막으로 전생의 무명(無明)과 그에 의한 모든 업에 의해 현생이 일어나고 또 현생의 행위에 의해 다시 내생이 결정된다는 육도 윤회를 말하는 것으로 현생의 업이 다음 생의 결과가 되는 것을 말한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다는 것은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진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삶 속에서 이 간단한 진리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과 접근방식만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것은 인과 관계 속에서 그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에 무상한 것이고 그 관계를 떠나서 홀로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이 지어낸 관념일 뿐이기에 마치 토끼의 뿔과 같이 허망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출처: 대한불교 조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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