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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참다운 출가는?
글쓴이 : 백련사 날짜 : 2009-01-09 (금) 14:26 조회 : 2789
이 름 :
백련사 [등록일 : 2008-10-01 오후 1:07:00]
제 목 :
이 시대의 참다운 출가는?
이 시대의 참다운 출가는?
승가의 사회참여에 관한 담론




최근 한국불교계의 최대 관심사는 ‘불교의 사회참여’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출가·재가를 막론하고 ‘불교의 대사회적 기능’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지금까지 한국불교계에서는 지나치게 깨달음을 강조한 나머지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불교도들은 사회참여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불교도들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불교폄훼와 종교편향 사례들을 지켜보면서 이대로 두면 ‘기독교공화국’이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명박 정부의 종교편향 정책이 오히려 불교도들로 하여금 사회참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된 셈이다.

그러면 불교에는 처음부터 사회사상이 전혀 없었던 것인가? 그렇지 않다. 불교의 사회적 기능은 ‘전도선언(傳道宣言)’ 속에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붓다는 승단에 60명의 제자가 생겼을 때, 제자들에게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전도의 길을 떠나라고 교시했다.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고까지 당부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법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이 전도선언 속에 불교의 존재 이유가 담겨져 있다. 즉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불교가 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승가의 대사회적 기능인 것이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불교가 오직 숭고한 이상, 더 높은 도덕적 철학적 사상에만 관심을 갖고, 사람들의 사회 경제적 복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붓다 당시 바라문들이나 종교사상가들은 형이상학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붓다는 오직 지금 당장 당면한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붓다는 일생 동안 사회문제의 해결을 위해 헌신했다. 사회고(社會苦)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삶의 궁극적 목표인 열반을 증득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붓다는 당시 국왕들에게 민중을 위한 정치를 하라고 조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붓다, 일생 동안 사회문제 해결 위해 헌신

초기불교 교단에서는 사회와의 소통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승가의 구성원들은 탁발에 의존하여 생활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현재의 남방불교에서는 그 전통을 지금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안거라고 해서 산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 아니다. 탁발은 365일 계속된다. 탁발을 통해 끊임없이 사회와 소통하고 있다. 사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승려들의 생존과 직결된다. 이를테면 자신이 머물고 있는 지역에 가뭄이나 홍수 혹은 기근이 들면 당장 승려들의 생계에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승가는 처음부터 사회와 떨어져 별개로 존재할 수가 없었다.

초기불교 교단에서 사찰의 위치가 마을과 너무 멀어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가까워도 안 된다고 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승가는 번잡한 세속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사회와 계속적으로 소통이 가능하였다. 불교사원은 처음부터 수행과 전법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도록 배려되었다. 지금도 남방불교의 사원은 정신적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남방불교의 사찰은 속된 말로 낮에는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한다. 지역사회의 온갖 문화행사가 사찰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붓다 당시 ‘수행공동체’인 승가는 사회속의 ‘섬’으로 비유되었다. 출가라고 해서 은둔적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어제까지 재가의 신분으로 생활하다가 출가하여 승단에 합류하면, 그 다음 날부터 자신이 살던 마을로 탁발을 나간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집을 지나칠 때도 있다. 출가한다고 해서 사회와 완전히 단절되는 것이 아니다. 승가는 끊임없이 사회와 소통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승가의 고유한 전통이다.

그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초기불교 교단에서 출가와 재가의 신분과 역할이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출가자는 출가자로서의 역할이 있었고, 재가자는 재가자로서의 역할이 있었다.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출현하기 전까지 출가자와 재가자의 관계는 이른바 법시와 재시의 관계로 잘 유지되고 있었다. 불교교단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출가라고 하면 세속을 떠나 산중에 은둔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되었다. 진정한 출가는 세상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멀리 달아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한 출가는 현실도피에 불과하다. 진정한 출가는 몸의 출가가 아니라 마음의 출가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붓다의 수제자인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는 “어떤 사람은 고행의 실행에 전념하며 숲속에서 살지만, 불순한 생각과 번뇌로 가득 차 있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마을이나 도시에 살면서 고행적 수행을 실행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은 청정하고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다. 이들 가운데 마을이나 도시에서 청정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분명히 숲에서 살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훌륭하고 위대하다.”(M.Ⅰ, pp.30-31)고 말했다.

사회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이 승가의 전통

한국불교가 대사회적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게 된 것은 출가자는 오직 세속의 삶에 대해서 초연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초세간적 삶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였던 것이다. 초세간적이라는 것은 오온(五蘊)의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체득하여 그 어떤 대상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출가자는 비록 몸은 세속에 의탁할지라도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삶을 일러 초세간적 삶이라고 한다. 출가자라고 해서 세속을 떠나서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인도의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전래되면서 출가자는 세속과 단절하여 산속에 은둔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다. 이러한 잘못된 전통과 관습이 곧 사회와의 단절을 가져오는 주된 요인이 되었다.

월폴라 라훌라는 “어떤 사람이 소음과 소란에서 벗어난 조용한 장소에서 은둔 생활을 하는 것이 유쾌할 수 있다. 그러나 이웃과 더불어 살고 그들을 돕고 봉사하면서 불교를 실천하는 것이 분명히 더욱 칭찬할 만하고 용기 있는 일이다. 어떤 사람이 나중에 되돌아와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만큼 강해지고자 예비적인 도덕적·정신적·지적 훈련으로써, 자신의 마음과 인격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한 동안 은둔생활을 하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평생 독신 생활로 살면서 이웃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행복이나 구원만을 생각한다면, 이는 확실히 사랑, 자비, 다른 사람에 대한 봉사에 기초하고 있는 붓다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다.”(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London: Gordon Fraser, 1959), p.77.)라고 지적했다.

승단은 자기 자신의 정신적·지적 발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에 기꺼이 일생을 바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다. 가족을 가진 평범한 재가자가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데 전 생애를 바칠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이에 반해서 가족 부양의 책임도 없고 어떤 다른 세속적 얽매임도 없는 승려는 붓다의 충고에 따라서 ‘많은 사람들의 이익,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전 생애를 바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초기불교 교단에서 출가자들이 유행(遊行)생활을 하게 한 것도 바로 사회와의 소통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정주(定住)생활로 정착되었지만, 결코 사회참여에 소홀한 것은 아니었다. 조준호 박사는 “출가자의 유행은 출가가 세속과 완전히 단절하지 않은 사회실천의 기능을 보여준다. 출가는 세간을 정화시키는 청정제 역할, 마치 연꽃이 더러운 진흙탕에 거하면서 연못을 맑히는 것처럼 출가자는 다시 세속으로 귀환(歸還) 또는 회귀(回歸)하여 세속을 성화(聖化)시키는 방식을 띠고 있다. 즉 속된 세상을 성화시키는 회향(回向)의 존재로서 출가자이다.”(조준호, <출가와 재가가 나누어진 사상적 이유>, '불교평론' 제35호(만해사상실천선양회, 2008·여름), p.225.)라고 하였다.

우리는 ‘참여불교’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영국 출신 로카미트라 법사는 참여불교라는 말을 사용하는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왜냐하면 불교 자체가 사회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참여불교는 붓다 당시부터 실행되었던 것이다. 붓다의 전생담인 <자따까(J&#257;taka, 本生譚)>은 모두 다른 생명들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보살행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붓다는 깨달음 이후 45년간 고통 받는 중생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이러한 붓다의 생애 자체가 바로 중생을 위한 사회참여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로카미트라가 지적한 바와 같이 ‘참여불교’라는 말을 사용하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부파불교 시대에는 이러한 붓다의 적극적인 사회참여 정신이 퇴색되었다. 당시 부파교단의 출가자들은 왕실이나 부호들의 외호를 받으며 승원 깊숙이 은거하여 오직 자기 수행에만 전념함으로써 민중들의 삶을 외면했다. 그들은 승가 고유의 사회적 기능을 소홀히 하였던 것이다.

중생없는 승가는 존재할 수 없다

이때 불교의 대사회적 기능을 되살리기 위해 일어난 운동이 바로 대승불교였다. 대승불교는 보살의 불교인 것이다. 보살은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 혹은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둘이 아님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후 대승불교도 점차 현학적인 철학사상으로 변질됨으로써 민중들과 점차 멀어졌다.

한편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후 중국불교는 왕실과 결탁함으로써 귀족화 권력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민중들의 삶을 대변하지 못했다. 특히 중국의 선불교는 자급자족을 지향하면서 민중들과는 담을 쌓고, 오직 승원 깊숙이 숨어 선수행에만 전념하였다. 승가의 대사회적 기능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현재의 세계불교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승려들은 권력층과 결탁하여 민중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있다. 그래서 붓다의 진정한 뜻은 ‘참여불교’에 있다고 외치게 되었던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일부 불교국가에서는 지금도 왕실과 국가권력에 의지하여 승가를 유지하고 있다. 가난한 빈민들과 민중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다. 그래서 일어난 운동이 바로 ‘참여불교’였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참여불교’ 운동이 불교발전에 기여한 바는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제부터라도 한국불교가 사회참여 문제의 중요성을 깨닫고, 사회문제가 곧 승단의 문제라고 자각하여 적극적으로 사회문제 해결에 앞장선다면, 위기는 곧 기회로 반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인도에서 불교가 멸망한 것도 불교의 대사회적 기능을 담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도불교의 멸망을 남의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불교가 민중들의 삶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그들은 불교를 외면하고 말 것이다. 종교의 기능은 크게 둘로 구분된다. 하나는 본래적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기능이다. 이 두 가지 기능 중에서 현대는 사회적 기능에 더욱 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중생 없는 승가는 생각할 수도 없다.

<삼국유사>에는 피은편(避隱編)과 함께 동진편(同塵編)이 수록되어 있다. 피은(避隱)이란 피하여 숨는다는 뜻이다. 피은편은 세상을 피하여 숨어 살았던 불교인들의 삶을 기록한 것이다. 반면 동진(同塵)은 먼지와 함께 하였다는 뜻이다. 동진은 '노자'에 나오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줄임말이다. 빛을 부드럽게 한다[和光]는 말은 스스로의 도나 덕을 숨긴다는 뜻이다. 그리고 먼지와 하나가 된다[同塵]는 말은 시정에서 사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숨어서, 그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이다.(김호성, <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서울: 정우서적, 2007), p.75 참조) 지금 이 시대의 참다운 출가자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의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사람, 즉 세속에 대한 증오와 원망으로 출가한 도피형은 붓다가 바라는 올바른 출가자라고 할 수 없다.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보살의 삶이야말로 진정한 출가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한국불교가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출처---중앙승가대 승가대신문 2008년 09월 0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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