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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식보생론(成唯識寶生論) 제1~5권
글쓴이 : 백련사 날짜 : 2013-01-03 (목) 11:46 조회 : 2081
성유식보생론(成唯識寶生論).hwp (160.5K), Down : 81, 2013-01-03 11:4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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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식보생론(成唯識寶生論)

성유식보생론 제1권

- 일명(一名) 유식이십순석론(唯識二十順釋論) -

대당(大唐) 삼장법사(三藏法師) 의정(義淨)이

명(命)을 받들어 한역

현성주 번역

중생들이 끊임없이 괴로움에 쫓기면서

활활 타는 모진 불이 마음속을 태우는데

보살께서 건지려고 자비심을 일으킴은

저들의 아픈 마음 자신으로 여김일세.

지혜로 부처 이룰 보살님께 경례하오니

많고 많은 온갖 번뇌 남김없이 없애시고

의지할 곳 없는 이의 귀의처가 되시면서

두려움에 떠는 이를 포근하게 안으셨네.

미소를 지으면서 마의 무리 항복시켜

밝은 지혜 깨달아 온갖 욕심 벗어나고

크게 건질 이 대승에 훌륭하게 머무시어

애욕 번뇌 그 뿌리가 마음임을 아셨구려.

논(論)1)에서 말하기를 대승에 의지해서 말한다면, 삼계(三界)의 성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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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논은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을 말한다. 이하 『이십론(二十論)』으로 약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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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식(識)뿐이다2)라고 하였다.

해석해서 말하리라.

또 무슨 뜻에서, 대뜸 대승이라 하였는가.

본래 보살께서 온갖 생명을 건지려는 큰마음을 품고, 금지한 계법[禁戒]을 굳게 지키면서, 온갖 종류의 생명에게 고루 미치어 유정(有情:중생)들을 건진다. 그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매우 훌륭하고 흠이 없는 행을 이루었다. 지극히 미묘한 길상(吉祥)은, 모든 부처님[善逝]께서 가신 길이며, 또 따라가야 할 한없이 큰길이다. 아울러 이룩한 결과도 지극히 높고 원만하니, 부처님 외에 알 수 없는 경지다. 이 뜻을 근거로 대승이라고 이름하였다. 경에서 말한 대로 대승은 보리살타(菩提薩)가 가야 할 길이며, 부처님의 훌륭한 과위(果位)이기도 하다.

이 대승을 이루기 위하여 유식관(唯識觀)3) 을 닦는 것이다. 유식관은 흠잡을 데 없는 방편의 바른 길이다. 이 모든 것을 위하여, 저 방편을 밝혔으니, 모든 경에는 가지가지 행상(行相)4)으로 널리 설한 내용이 들어 있다. 마치 흙·물·불·바람과 그에 딸린 물건들과 같다. 그 물건의 종류는 알 수 없이 많고, 방위와 장소도 한없이 넓다. 이로 인하여 마음에서 모양이 나타남을 살펴 알고, 드디어 모든 곳에서 바깥 모양을 버리고, 기쁨과 슬픔 따위를 멀리 여읜다. 또 넓은 존재의 바다[有海]에는 시끄러움과 고요함의 차별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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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십론』이 경전(經典)의 삼계유심(三界唯心)을 근거로 대승(大乘)의 삼계유식(三界唯識)을 세운 데 대해, 본서는 그 뜻을 설명하려고 첫머리를 열었다. 여기서부터『이십론』의 대승의 삼계유식을 안립하노라[安立大乘三界唯識]에 대한 해석이 시작된다.

3) 유식삼성관(唯識三性觀)이라고도 하는데, 삼성(三性: 遍計所執性·依他起性·圓成實性)을 유식으로 관하여 체득한다는 뜻이다.

4) 『유식론(唯識論)』 권2에는 식의 판별(判別)은 행상(行相) 때문이라 하였고, 또 『성유식술기(成唯識述記)』3본(本)에는 마음에 인식의 대상이 떠오름을 행상이라 한다고 하였으며,『구사론광기(俱舍論光記)』제1에는 심왕(心王)과 심소(心所)의 체(體)가 청정하면, 앞경계를 대할 때 마음이 작용하지 않더라도, 법대로 자유롭게 영상(影像)이 드러나니, 마치 맑은 호수나 밝은 거울에 비치는 그림자와 같다. 이를 행상이라 한다고 하였다. 곧 이 마음속의 영상을 표현한 말의 모임을 행상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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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을 관찰하고, 저 작은 길을 버린다.

대승의 길을 포기하였거나, 온갖 존재를 즐겨 집착한 무리라면, 대승의 길을 마치 높고 험한 벼랑을 보듯 깊이 두려움을 일으키리라.

올바르게 중도(中道)로 나아가서, 만일 단지 이것이 자기 마음에서 이뤄진다는 사실을 안다면, 한량없는 양식[無邊資糧]을 쉽게 쌓아 모으게 된다.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으니, 마치 작은 노력으로 큰일을 이룰 수 있는 것과 같고, 부처님이 밟아간 길도 오히려 손바닥을 보는 것과 같으리라. 이러한 이치에서 마음속의 소원은 마땅히 뚜렷하게 채워질 수 있어서, 마음을 따라 진행되어 간다.

비록 인정한 바와 같이 바깥 일이 있더라도, 마음속의 의욕이 진실하고 소중한 큰 서원의 힘이기 때문에, 무변한 6바라밀[六度]의 피안(彼岸)에 도달할 수 있다.

만일 이와 다르다면 베풀 수 있는 물건을 다 가지고 보시를 행할지라도, 베풀어야 할 온갖 생명에게 어찌 고루 미치어 그들을 기쁘게 하며, 구하는 마음을 따라 맞출 수 있겠는가. 이것은 문득 끝없는 경계를 지으리니, 베푸는 일은 끝날 기약이 없으리라.

또다시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는 계율 등을 가지고, 지장이 없이 지킬 수 있는 중생들에게, 저들의 욕구를 따라 다 뜻에 부합하도록 저들의 희망하는 것을 들어 바르게 보시 등을 행한다면, 빠르게 곧 바른 깨달음의 양식을 거둬 모으리라. 이에 따르면 단지 자신의 마음뿐이니, 또 어찌 바깥 경계에서 찾으랴.

만일 바깥 일을 인정한다면, 역시 바른 이치와 뜻이 서로 어긋난다. 그러므로 분명히 알라. 경계는 이 훌륭하고 미묘함을 성립시키지 못한다. 만일 자기 마음을 의지하여, 허망하게 분별을 낸다면, 색 등의 견해를 지어 몸이 나라는 생각[身見] 등을 일으킨다.

실제로는 자기 이외의 모든 유정(有情)을 상대로, 인식의 대상(所緣)을 짓지 않음이 없어야만, 오염(汚染)에서 벗어나는 근거가 생기리라.

그러나 보시 등에서 각기 그 일을 따라서 결과를 얻을 수 있으니, 참으로 식(識) 이외에 경계의 일을 빌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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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식 외에 다른 경계가 있다고 한다면, 결국 경계에 의지하여 온갖 번뇌를 일으킨다. 이미 꽉 붙들려 얽매였으니 따라 구르면서 머물게 된다.

이 잘못을 보아야만 벗어날 마음이 생겨서, 깊이 싫어하며 버릴 생각을 품으리라. 큰 깨달음을 바라지 않는다면, 이미 유정세간(有情世間)을 버린 것이니, 어찌 큰 이로움을 베풀려고 하겠는가. 모든 중생을 거둬 주지 않기 때문에 작은 마음으로 자기만을 건질 뿐이요, 큰 행을 이루기는 어려우리라. 그러니 모든 보살[覺情]들은 이를 의지하여 변해야만, 비로소 보리(菩提)의 양식을 길러낼 수 있다. 객진(客塵)5)의 조작된 일[有爲之事]을, 마음속에 싫어하여 등지기 때문에, 조작됨이 없는 법[無爲法]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작됨이 없는 법 자체가 더 이상 자라나지 않기 때문에, 그 외 다른 소승의 적멸[小寂]을 구한 결과, 치우쳐 한쪽만을 깨닫게 되고. 위없는 깨달음의 산은 무너지고 만다. 만일 바깥 경계를 벗어난다면, 좋아하고 싫어함이 모두 없어져서, 바른 깨달음은 쉽게 이뤄지리라..

크게 가엾게 여김[大悲]을 항상 마음속에 품었다면, 어찌 보리살타의 최고 과위(果位)가 비로소 성취되지 않으랴. 유식(唯識)이란 말도 곧 어긋나며 해롭다고 하리라. 크게 가엾게 여김이란, 반드시 다른 사람을 의탁해서 인연을 맺는 성질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바깥 경계를 없애 버리고, 단지 자신의 식(識)만을 인연할 뿐이라면, 이야말로 곧 자신만을 가엾게 여김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남을 이롭게 하려는 뜻을 품어야만, 큰 행이 비로소 세워지는데도, 오직 자기 몸만을 돌아볼 뿐이라면, 중생을 널리 제도하는 이치에 어긋나리라.

비록 바른 책임[雅責]을 진술하더라도, 이로 인해서 허물이 없어지리라. 밖의 상속(相續)을 빌려서, 더욱 불어나는 연[增上緣]이 되면, 자기의 식(識) 가운데에서 중생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를 연(緣)으로 경계를 삼고, 중생의 경계에 크게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서 널리 이롭게 한다면, 이는 어긋나지 않는다. 결정해서 이와 같이 마땅히 믿는 마음을 일으켜야 하리라. 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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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객진번뇌(客塵煩惱)로서, 번뇌를 나그네[客]와 티끌[塵]에 비유, 허망하여 실재하지 않음을 나타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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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물질의 모양이나 소리 등의 경계에서 낱낱이 추구해 보아도, 거기에는 '나'가 없다. 냄새·맛·촉각·법을 다 모아 찾아보아도 역시 '나'는 없다. 그렇지만 '나'를 찾는 본래의 성품은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똑같이 인정한 무아(無我)로 종(宗)을 삼았다면, 앞으로 어디에다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겠는가.

세상에서 공동으로 인정하는 그 감각의 허망한 집착[情妄執]을 인식 대상의 모양[所緣相]으로 삼고, 그것을 중생[有情]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니 또한 감각으로 허망하게 집착한 일을, 곧 바깥 경계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리라. 이를 근거로 마땅히 알아야 하리니, 가령 속으로는 좋아하지 않을지라도, 이치로는 반드시 그렇다고 인정해야 하리라. 단지 자기의 식(識)에서만 유정의 형상[有情相]이 나타날 뿐이며, 이 일을 의지하여 색의 모양[色相]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바깥 경계가 없음을 알아야만 한다. 만일 이 식(識)을 떠난다면 결코 얻을 수 없으니, 이는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뒤바뀜이란 무엇인가.

원래 바깥 경계가 없으나, 보고는 실제의 사물로 여겼으니, 허망하게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끝내는 위없이 높은 경지를 이룰 수 있다고 해야, 이치에 맞다, 유식(唯識)의 견해는 진실하기 때문에 위없이 높은 경지[彼]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서, 깊이 도리에 부합하게 된다.

어떻게 해야 이것이 진실한 견해임을 알 수 있겠는가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뿐이라는 것을 경전에 밝혀 설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다투는 일이 있어서, 결정을 내리려면, 반드시 두 문(門)을 의지해야 한다. 첫째는 아급마(阿笈摩)6)를 따라야 하고, 둘째는 바른 이치에 부합해야 한다. 성인(聖人)께서 진실[無倒]하게 베푼 말씀이 간직된 전교(傳敎)를 상대에게 믿을 수 있도록 증명하려면, 아급마를 이끈다. 만일 이를 믿지 않는 그 밖의 사람을 위한다면, 마땅히 바른 이치를 펼쳐야 한다. 때로는 두 종류의 사람을 위해서 아급마와 바른 이치 두 가지를 함께 피력하기도 한다. 믿을 수 있는 방법이라야 편안하게 자리를 잡아 머물기 때문에, 그 바른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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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아함(阿含)이라고도 하며, 교(敎)·전래(傳來)·전교(傳敎) 등으로 번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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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를 펼치는 것이다. 또 그 논설의 바른 이치를 밝히는 데 의지할 곳이 있으면, 아급마를 설한다. 그 바른 이치를 전래된 교리에 의지하지 않음에 따라 아직 참다움을 보지 못한 자는, 그의 온갖 언설이 잘못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일러 '억지 생각으로 끼어 맞춤[强思搆]'이라 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아급마란 곧 바른 이치를 성립시키는 데 의탁해야 할 곳임을 알아야 한다. 혹은 자기가 소속된 부파(部派)에 힘을 쓰기 때문에, 이를 위해 먼저 아급마의 가르침을 편 이래로 뜻을 의지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대승(大乘)에 의하여 설했다는 것은, 곧 제7성(第七聲)7)으로서, 그 해야 할 일을 지목한 것이다. 말하자면 저 대승의 이치를 깨닫게 하려고, 유식관(唯識觀)을 설한다는 뜻이다. 유식관이 진실함으로 헛된 성질이 아님은, 아급마에 잘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만일 오직 언설(言說)로서의 대승(大乘)만을 의지한다면, 마치 뜻에서 임시로 탄다[乘]라고 이름한 것과 같이 제7성의 설한 소리[第七聲所說聲]를 따른 것이다. 말하자면 대승의 말과 가르침이 모여 있는 곳의 진실한 구절과 내용[眞實句義]에 의탁하여, 이를 성립시킨 것이다. 단지 오직 이 식 뿐(唯識)이라고 함은, 그 세운 바 종(宗)의 뜻(義)을 대승교(大乘敎)에서 밝히려고 하였으며, 한 모퉁이만을 이끌어서, 세운 바 종(宗)이 자신의 교에 위배되는 일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무엇 때문에 아급마(阿笈摩: 傳敎)라고 이름하였으며, 갑자기 인증(引證)을 시작으로 이 말들을 늘어놓았는가.

말하자면 이치에 맞는 교(敎)를 능숙하게 설하는 이로부터, 저 상속을 빌려서 더욱 불어나는 연[增上緣]이 되어야만, 이 교법(敎法)은 비로소 받아들이는 이로부터 생긴다. 식(識)의 차별은, 자체에 공능(功能)이 있어서, 뚜렷하게 앞에 머문다. 어떤 이는 몸소 듣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전하여 설하기도 한다. 말로 밝히는 일에서, 그 느낌의 모양과 상태가 차례로 발생함은, 마치 붓이 획을 그어 가는 대로 문장과 글귀가 그 생김새와 단락이 밝고 환하게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로부터 나왔기 때문에[從他來故] 아급마라고 이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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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귀로 듣는 소리에 열한 가지가 있으니, 그 가운데 일곱째인 '세속에서 공통으로 쓰는 말[世所共成]을 가리킨다.『잡집론(雜集論)』권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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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만일 또 어떤 때는 저절로 마음속의 기억이 되살아나, 본래의 모습을 따라서 식(識)이 비로소 발생한다면, 바로 거기에서 나왔으므로[從彼生故], 아급마의 이름을 얻으리니, 오히려 자기의 말을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이름함과 같으리라. 듣는 이의 뜻 모양이 지혜의 원인이기 때문에, 지혜의 양식[智資糧]이라고 이름하니, 어찌 일체가 단지 오직 식뿐이라고 하지 않으리요. 이것이 인정한 바와 틀리기 때문에, 자신의 말 자체에 서로 어긋남이 있다 하리라.

이치가 결코 그렇지 않다. 색(色)에 별도의 다름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식(識)의 차별에 의하여 색이 건립되었으니, 마치 무색계(無色界)가 소유한 차별과 같다. 무색계는 실로 색(色)이 없으니, 단지 식(識)만을 의지하고 네 종류로 나뉘어, 공무변처(空無邊處) 등을 세운 것과 같다. 나머지 세계8)도 마찬가지다. 가령 또 셋이라고 말한들, 식(識)에 무슨 방해가 있으랴. 오히려 유정(有情)은 비록 차이가 없을지라도, 그러나 욕계(欲界), 색계(色界)의 다름을 확실하게 건립함과 같다. 그 묶인 바를 따라서 색이 차별되었기 때문에, 색(色)이 비록 달라짐이 없을지라도, 별도로 건립함은 잘못이 없다.9)

어째서 경교(經敎)에서 밝힌 오직 마음 뿐[唯心]이라 하지 않고, 이제 종을 세우면서 오직 식뿐[唯識]이라고 하는가.10)

본교(本敎)와 어긋나게 설하니, 참으로 허공을 잡는 듯 하다.

뜻이 돌아갈 자리가 있으니, 참으로 아무런 잘못이 없다. 이미 먼저 심(心)·의(意)·식(識)·요(了)는 이름의 차별(差別)이다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동일한 체[同體]의 일이므로, 이름을 다 갖추어 진술하지 않았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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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식무변처(識無邊處)·무소유처(無所有處)·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말한다.

9) 이상은『이십론』의 대승의 삼계유식을 안립하노라[安立大乘三界唯識]에 대한 해석이다.

10) 여기서부터『이십론』의 경전에 삼계는 오직 마음뿐이라고 하였다. 심(心)·의(意)·식(識)·요(了)는 이름의 차별이다. 이 가운데 심(心)이라고 말한 것은 의(意)가 심소(心所)를 겸했다는 뜻이다[以契經說 三界唯心 心意識了 名之差別 此中說心 意兼心所]에 대한 해석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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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달라진 이름으로 그 뜻을 선양한 것이다. 곧 오직 알 뿐[唯了]이란 말은, 일반 대중이 공동으로 인정하여 쓰는 말이 아니다. 뜻을 이해시키려고 할진댄, 공동으로 아는 소리를 가지고, 다시 그 외 다른 이름을 펼쳐나가면서, 또다시 경과 서로 틀리지 않음을 밝혀야 한다. 의(意)와 식(識)의 두 소리를 겹쳐 설해서, 저 두[心·了] 뜻에 견주어 보면, 체(體)도 다르지 않고, 그 과(果)도 그대로임을 알 것이다. 만일 반드시 경과 틀리지 않은 점을 밝히기 바란다면, 심(心)과 요(了)의 두 소리는 똑같이 하나의 뜻이다.

경교(經敎)와 틀리지 않음을 밝히면서, 이미 두루 막힌 곳을 풀었으니, 어찌 의(意)와 식(識)을 다시 설해 주기를 바라리요. 그러나 만일 요(了)라는 소리가 심(心)의 달라진 이름이라고 한다면, 심(心)이 심소(心所)를 마주 대할 때, 여기에 별도로 체(體)가 있으리라. 이것은 마치 어떤 경계에서 같이 태어난 무리들이 예전에 잠잤던 일 등을 생각하면, 문득 없어짐과 같다. 이것은 앞과 뒤의 이치가 서로 어긋난다.

참으로 여기에는 잘못이 없다. 근거할 바가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심(心)이란 말은, 서로 응함이 있음을 인정함이요. 이 요(了)란 말은 겸해서 그것들을 포섭한 것이다.

만일 이와 같다면, 식(識) 외의 경계를 심의(心意)라고 밝힌 것이므로, 그 심(心)의 자리에는 유(唯) 소리를 두었고, 의(意)에는 취함과 버림을 두어서 이로써 과(果)를 삼았으니, 만일 경계가 없다면 결국 그것은 소용이 없게 되리라.

오직[唯]이란 소리는 부정하지 못하리니, 마땅히 다음과 같이 질책하리라. 당장에 인식 대상의 경계[所緣境]마저 버린다면, 무엇을 가지고 소용없다고 말하랴.

만일 이렇게 이해한다면, 동일하게 생기는 법[同生法]과 인식 대상의 경계가 함께 이 마음을 떠나서 따로 그 자체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한 쪽은 부정해서 버리고, 한쪽은 남겨 둠을 보리라. 어찌 일에 유래[由]의 단서도 없이, 쓸데없는 말로 혼자 즐길 수 있겠는가.

만일 다른 뜻이 없다면, 참으로 힐난한 바와 같으리라. 그러나 경계에 마음이 모여서 공동으로 인연하는 결단(決斷) 등의 일이, '똑같은 종류의 성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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