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주림(法苑珠林) 100권 중 제 71~80권
법원주림 제 71 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송성수 번역
80. 죄복편(罪福篇)[여기에는 4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업행부(業行部) 죄행부(罪行部) 복행부(福行部)
(1) 술의부(述意部)
저 선(善)과 악(惡)은 서로 뒤집히고 밝음[明]과 어두움[暗]은 서로 반대가 되는데, 죄(罪)와 복(福)은 은연중에 서로 마주 대하고 있어 눈앞에 있는 일처럼 환하다. 그런 까닭에 악을 이름하여 부추(俯墜 : 굽혀 떨어진다는 의미)라 하고 선을 이름하여 청승(淸升 : 맑아서 올라감)이라고 하며, 복을 바로 부요(富饒 : 풍부하고 넉넉함)라고 하고, 화(禍)를 최절(?折 : 꺾이고 끊어짐)이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죄와 악의 법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복과 선(善)의 공덕은 꼭 짓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성인의 가르침이 명백하나니 오르고 잠기는 것으로 관찰해 알 수 있느니라.
(2) 업행부(業行部)
범부(凡夫)의 복행(福行)에 대해서는 혹 흑백업(黑白業) 실행하는 본체란 무엇인가?
『지도론(智度論)』에서 "살해(殺害) 등은 곧 불선업이고, 보시(布施) 등은 바로 선업이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이 말은 곧 죄와 복의 두 가지 행(行)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살생 등이라고 한 것은 열 가지 악행(惡行)을 모두 취한 것으로서 똑같이 죄업을 짓는 행이라고 말한 것이고, 보시 등이라고 한 것은 수행하는 일 중에서 지계(持戒)와 선정(禪定) 등의 업을 모두 취한 것으로서 이것은 다 세상의 선행이므로 모두 복행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세상의 선행 가운데 여덟 번째의 선정이란, 욕계(欲界)의 난선(亂善)3)다만 모든 죄와 복에 있어서 사람마다 행하는 것이 같지 않아서 혹 어떤 사람은 오로지 복만 닦는 이도 있고, 혹 어떤 사람은 오직 죄만 짓는 이도 있으며, 혹 어떤 사람은 죄와 복을 함께 행하는 이도 있다. 오로지 복만 닦는다고 한 것은,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淨心]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다만 모든 죄와 복에 있어서 사람마다 행하는 것이 같지 않아서 혹 어떤 사람은 오로지 복만 닦는 이도 있고, 혹 어떤 사람은 오직 죄만 짓는 이도 있으며, 혹 어떤 사람은 죄와 복을 함께 행하는 이도 있다. 오로지 복만 닦는다고 한 것은,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淨心]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보시와 계율 등을 실천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고, 오로지 죄만 짓는다고 한 것은, 자애로움과 윤택하게 하는 것[慈潤]이 없어서 몸과 입과 뜻이 움직이기만 하면 다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을 이르는 말이며, 죄와 복을 함께 행한다고 하는 것은, 복을 닦을 때에 마음이 부정(不淨)하여 때로는 겸하여 사물에 손해를 끼치기도 하나니, 이것은 곧 욕계의 잡업(雜業)으로서 순수하게 깨끗한 것[純淨]이 아니기 때문에 역시 부정(不淨)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만일 죄가 되는 행위를 논하면 크게 나타나는 것[?顯]을 알 수 있고, 만일 잡업에 대하여 논하면 깨끗한 복이 되는 행위와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는데 조금 은밀하여 알기가 어렵다. 말하자면, 복을 닦는 모든 것들이 다 그 외형(外形)에 의거하는 것이라서 일을 하는 중에 믿고 즐거워하는 것이 하는 일마다 다 같으며, 만일 속마음[內心]에 의거하면 자기 자신을 위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구하는 것이 각기 다르고 정밀하고 거친[精?] 정도가 같지 않다는 것이다.
복을 닦는 모든 것은 겉은 같으나 속이 다르기 때문에 순업(純業)과 잡업(雜業), 이 두 가지 업이 똑같지 않다. 만일 마음을 잘 길들이고 자비(慈悲)로 세상을 불쌍하게 여기면, 그런 보시를 따르는 것은 다 큰 선(善)이 되겠지만, 만일 생각[念]을 잘 지키지 못하고 형상만 보고 복을 닦으면 안은 거칠고 밖은 미세하여 오직 잡업만 이룩하게 될 것이다. 저 어리석은 마음에 맞으면 비록 세상을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이치는 실로 도에 어긋날 것이니, 이것도 깨끗한 복행은 아니다. 복을 닦을 때에 생(生)은 공(空)한 것이라는 이치를 관찰하지 않고, 나[我]라고 하는 착각이 항상 있어서 3성(性)에 두루 통함으로써 온갖 짓는 업이 착각과 서로 호응하기 때문에 이것은 임시로 성(性)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도를 어기는 것이 된다.
선하지 않은 마음으로 세상의 과보를 많이 구하고 또 명예를 많이 구하기 때문에 깨끗한 복이 아니다. 이 순수한 뒤섞인 업으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이 많이 미혹하기 때문에 지금 대략 부분적이나마 논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분별하여 행하게 하려는 것이다.
먼저 뒤섞인 업[雜業]에 대해 논하고 뒤에 청정한 복업[淨福]에 대해 밝히겠다. 다만 온갖 뒤섞인 업에는 거칠고 미세한[?細] 것만 있다. 거친 것은 악한 일을 하는 것으로서 다른 사람까지 해롭게 하는 것이고, 미세한 것은 제 자신만을 위해 오직 세상의 과보를 구하는 것이다.
먼저 거친 것으로서 뒤섞인 업에 대하여 논해 보겠다. 가령 보시(布施)에 대해 논하면, 혹 어떤 이가 법답지 못하게 재물을 취해 보시한다고 하면, 이것은 다른 사람의 재물을 훔쳐다가 보시하는 것과 같다. 이로써 얻는 과보는 도리어 항상 쉽게 없어지며, 보시를 하고 난 뒤에 후회하면서 얻는 과보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에서 말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보시를 하고 난 뒤에 후회하는 마음을 내거나, 만약 남의 재물을 빼앗아서 그것을 보시한다면, 이 사람은 미래에 비록 재물을 얻는다 하더라도 항상 소모되고 말아 재물이 쌓이지 않을 것이다."
혹 어떤 사람은 보시를 행하고도 남을 해롭게 하는 이가 있으니, 말하자면 보시를 할 때에 선한 생각을 가지지 않고 혹 성을 내거나 혹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면 그는 반드시 악한 세계에 떨어진다. 그는 비록 복의 과보를 얻는다 하더라도 축생이 되어 따로 과보를 받게 되고 인간이나 천상에는 태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분별업보경(分別業報經)』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큰 보시를 닦고 실천하더라도
성질이 급하고 성을 많이 내거나
바른 생각에 의지하지 않으면
뒤에는 큰 용의 몸이 되리라.
큰 보시를 잘 행하더라도
교만하여 남을 업신여기면
이 업을 지음으로 말미암아
힘이 아주 센 금시조(金翅鳥)가 되리라.
만약 복을 닦되 세상의 과보를 구하기 위해서 한다고 하는 것은 재물을 버릴 때에 다가올 과보를 바라고 하는 것을 말한다. 혹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이 무상(無常)하게 될까봐 두렵기 때문에 버리거나, 혹은 명예를 위하는 등,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구한다면, 그것은 자비로써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비유하면 마치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같아서 순수하고 깨끗한 업이 아니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이런 것을 부정한 보시[不淨施]라고 하였다.
『백론(百論)』에서 말한 것과 같다.
"과보를 위한 보시는 이것을 깨끗하지 못한 보시라고 한다. 그것은 마치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과 같기 때문이다.
과보에는 두 가지가 있다. 현보(現報)라는 것은 명예롭고 남에게 공경 받고 사랑 받는 것이요, 후보(後報)라는 것은 후세(後世)에 부(富)하고 귀(貴)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깨끗하지 못한 보시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장사꾼이 멀리 다른 지방에 가서 비록 여러 가지 잡된 물품을 가지고 많은 이익을 남겼다고 해도 그것은 중생들을 가엾고 불쌍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구한 것이기 때문에 이 업이 깨끗하지 못한 것처럼 보시를 하고 과보를 바라는 것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이것으로써 증명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진실한 자애로움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이 자신의 명예만을 바라거나 혹 미래의 과보만을 위하면, 아무리 널리 보시한다 하더라도 모두가 깨끗한 업이 아니요, 그 업이 깨끗하지 않기 때문에 얻는 과보도 정밀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분별업보경(分別業報經)』에서 말하였다.
"만약 천상에 태어나기 위하여 보시하거나, 혹은 또 명예를 구해서이거나, 은혜를 갚기 위해서이거나, 어떤 과보를 바라서이거나, 두렵고 무서워서 그 때문에 보시를 행한다면, 그 얻는 과보가 청정하지 못하고 받는 것도 대부분 추하게 되느니라."
보시의 실천이 이미 그러하므로 지계(持戒) 등 모든 선업이 깨끗하지 못한 것도 다 이와 같다.
그러므로 『백론(百論)』에서 말하였다.
"깨끗하지 못한 지계라는 것은 스스로 즐거운 과보를 구하는 것이다."
만일 계율을 지켜 천상에 태어나서 천상의 여인들과 즐겁게 놀기를 구하거나, 혹은 인간 세계에서 부귀하게 되어 다섯 가지 욕락[欲]의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면, 그것은 음욕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모양[相]을 덮은 것과 같다. 마음속으로는 남의 여자를 탐내면서 겉으로 거짓 친하고 선한 척하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 밖에 미세[細]한 마음으로 깨끗하지 못하게 계를 지키는 것은, 아난(阿難)이 난타(難陀)에게 말하고 나서 게송을 설한 것과 같다.
마치 숫양이 뿔을 맞부딪치면서 서로 싸울 때
앞으로 나가기 위해 다시 물러서는 것처럼
그대가 음욕을 위해 계율을 지킨다면
그 일도 또한 이와 같다네.
마음을 열어 오로지 다른 사람의 이익만을 위하면 얻는 복이 많으리라. 또 보시의 상대로 가난한 이도 있고 병든 이도 있다. 혹 어떤 이는 법을 알면서도 생활이 궁핍한 경우도 있으니, 만일 그런 이들에게 보시하여 이익이 되게 하고 오래도록 선하게 하면, 그 보시는 틀림없이 얻는 복이 많을 것이니라.
그러므로 『현우경(賢愚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다섯 가지 보시[施]에 대하여 찬탄하시면서 얻는 복이 많다고 하셨다. 이른바 멀리서 온 사람과 멀리 가는 사람과 병들고 수척한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 배고프고 굶주린 사람에게 음식을 보시하는 것, 법을 아는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보시는 현재 세상에서 복을 얻느니라."
이 보시는 마땅한 것이어서 현재 세상에서 많은 복을 얻나니, 이것은 명예를 구하는 보시와는 같지 않다. 요긴하지 않는 곳에 보시하는 것은 아무리 많은 재물을 할애하여 보시한다 해도 깨끗한 과보를 얻지 못한다.
또 다른 사람이 보시하는 것을 따라 기뻐한다는 것은, 만약 온갖 것을 바라서 지극히 거칠고 착하지 못한 짓을 하면, 이것은 곧 미세한 죄[細罪]가 되지만 그래도 그 또한 선(善)이라고 할 수 있으며, 만약 욕심 여의기를 바라고 또 오로지 다른 사람만을 위한다면 이것은 잡업(雜業)이니, 바로 죄가 된다.
그러므로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하였다.
"거친 사람[?人]에게는 큰 죄[?罪]가 있고, 섬세한 사람[細人]에게는 미세한 죄[細罪]가 있다."
그런 까닭에 이런 잡업은 죄와 복을 함께 행하는 것이니, 바라는 마음이 순수하지 못하면 이것은 깨끗하지 못한 업이다.
이상 여기까지는 죄와 복을 함께 행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것으로 욕계의 깨끗하지 못한 잡업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만일 깨끗한 업[淨業]에 대하여 알려고 하면 앞의 잡업을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백론(百論)』에서 말하였다.
"깨끗한 보시란, 만일 어떤 사람이든지 사랑하고 공경하며 이익이 되게 하면 그가 얻는 복도 또한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과경(因果經)』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만일 어느 누구든 가난하고 궁색한 사람으로서
보시할 만한 재물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 보시 행하는 것을 볼 때에
따라서 기뻐하는 마음을 내어라.
따라서 기뻐한 복의 과보는
직접 보시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또 『대장부론(大丈夫論)』에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한 사람에게 보시하면
공덕의 크기가 대지(大地)와 같지만
자신만을 위해 모든 사람들에게 보시하면
그가 얻는 과보는 겨자만큼 작다.
액난에 처해 있는 한 사람을 구제하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한 보시보다 낫다.
수많은 별이 아무리 광명이 있다 해도
하나의 밝은 달의 광명만은 못하다.
만일 모든 범부들이 죄와 복을 지으면서 인과(因果)와 선악(善惡)이 아무 성질이 없다[無性]는 것을 알지 못하면, 이것은 일은 잃어버리고 그 성질에만 집착함으로써 항상 삼유(三有 : 三界)에 얽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비유하면 파리는 어느 곳에나 달라붙지 않는 곳이 없지만, 오직 불꽃에만은 달라붙지 않는 것처럼, 중생들의 애착도 또한 이와 같아서 선한 법[善法]이나 선하지 못한 법[不善法]에 모두 집착하고, 나아가 아무 생각이 없는 데까지도 집착한다. 그러나 오직 성질이 공(空)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의 큰 불에 대해서는 애착을 가지지 않는다. 이것으로써 증명하여 알 수 있나니, 선하고 악한 성질이 없는데도 항상 다섯 갈래의 세계를 윤회한다면 그것은 바로 불성(佛性)이 없는 중생에 해당한다."
이상에서는 범부의 죄와 복, 이 두 가지 행업(行業)이 일에 미혹하여 그 성질에 집착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상으로 소의(所依)의 경론(經論)을 마친다.
(3) 죄행부(罪行部)
이것은 성자(聖者)가 뒤의 복행설(福行說)에 나아가기 위하여 먼저 밝힌 것이다.
죄의 행[罪行]이 있다고 말한 것은, 다만 이 죄의 행위는 망견(妄見)이 경계에 물들어 나니 남이니[我人] 하고 고집스럽게 결정하고, 어기고 순종하는 것[違順]에 집착함으로써 곧 자신과 남[自他]으로 하여금 모두 악한 업을 성취하게 한다.
그런 까닭에 경전에서 말하였다.
"탐욕이 생겨나고 사라지고 하지 않으면 마음을 괴롭게 할 수가 없다. 만일 사람이 나라고 집착하는 마음이 있고 또 얻은 견해가 있다고 하면, 이 사람은 탐욕 때문에 장차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 밖에 비록 다른 경계는 없지만, 그 미혹한 정(情)에 맞는다고 해서 억지 견해로 물들어 집착하는[染着]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꿈속에서 경계를 보고 온갖 탐욕과 분노를 일으키는 것과 같다. 그 꿈과 맞다고 해서 사실이요 거짓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치로는 실제의 경계가 없는 것이요 오직 감정의 허망한 견해[妄見]일 뿐이다.
그러므로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꿈속에서는 선한 일이 없는데도 그것을 선하다 하고 성낼 만한 일이 없는데도 성을 내며, 두려운 일이 없는데도 두려워하는 것처럼, 삼계(三界)의 중생들도 또한 이와 같아서 무명(無明)의 잠[眠] 때문에 꼭 성낼 일이 아닌데도 성을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 밖에 아무리 별도의 경계가 없다 하더라도 저 미혹한 감정과 어울리면 망견(妄見)이 더러움을 일으키며, 마음 밖에 아무리 지옥 따위의 모습[相]이 없다고 하더라도 악한 업이 이루어졌을 때 허망한 견해로 인하여 괴로움을 받는 것이다.
『정법념경(正法念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염마라(閻魔羅) 사람은 중생이 아닌데도 죄인이 그들을 보고 이들을 중생이라고 생각하여 손에 벌겋게 달아오른 쇠칼[鐵鉗]을 잡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 지옥에 있는 사람들의 악한 업이 이미 다 없어져서 목숨을 마치고 난 뒤에는 염마라의 옥졸(獄卒)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저 옥졸은 곧 중생의 수(數)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기름의 심지가 다하면 등불이 꺼지고 마는 것처럼 업이 다하는 것도 그와 같아서 다시는 염라(閻羅)의 옥졸이 나타나지 않는다. 마치 염부제(閻浮提)의 햇빛이 이미 나오고 나면 어두움이 없어지는 것처럼, 악한 업이 다할 때에 염라의 옥졸들도 또한 이와 같아서 사나운 눈과 악한 입을 한 중생의 모습과 같은 두려워할 만한 색(色)이 다 없어진다. 또 그림을 그려놓은 벽을 부수면 그림도 또한 따라 없어지는 것처럼 염라 옥졸의 무서운 모습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글로써 인증(引證)하면 중생들이 악한 업으로 인해 마땅히 고통을 받아야 할 중생은 자연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도 망령되게 지옥을 보는 것이다.
지옥을 보는 이에겐 눈에 보이는 옥졸과 호랑이·이리 따위가 다 허망하게 보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지옥에 염라가 있어서 모든 죄인을 판결한다면, 그 경계는 있는 것이 분명한데 어찌하여 없다고 말하는가?
그가 지옥의 주인[閻羅]을 보는 것도 또한 바로 허망하게 보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죄인이 지은 악한 업이 마음을 훈습(薰習)함으로써 마음을 변하게 하여 아무것도 없는데 망령되게 보지만 실은 지옥엔 염라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론(唯識論)』에서 말하였다.
"저 지옥에는 지옥의 주인이 없는데 지옥의 중생들은 자연스럽게 업에 의하여 지옥의 주인과 갖가지 고통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을 일으켜, '이것은 지옥이다, 지금은 곧 밤이다, 지금은 바로 낮이다'고 하거나, '나는 악한 업 때문에 개를 보고 새를 보며, 혹은 산이 억누르는 것을 본다'고 한다."
이 글로써 증명하면 선과 악이 마음을 훈습하여 그 마음으로 하여금 달리 보게 하지만 실로 지옥이란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마음 밖에 지옥이 없지만, 악한 업이 이루어졌을 때에 억지로 망령되게 보는 것이다.
이 고통의 업보(業報)는 이미 선한 일이 아닐진대 그렇다면 어찌 바로 선을 이야기해 익히게 하지 않고, 하필 감정에만 맞추어 괴로움의 업을 말하는가?
선과 악, 인(因)과 과(果)는 그 법이 반드시 서로 대치되는 것이다. 만약 그 탐욕 등이 바로 죄가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보시 등이 곧 선한 것임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만일 세 갈래 악한 세계가 바로 괴로움이라고 설명하지 않는다면 인간과 천상 등의 즐거움을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범부의 죄행(罪行)을 설명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싫어하게 하고, 선한 데로 돌아가야 함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만일 그가 근기가 둔한 사람이라면 이 괴로운 업을 듣고 그것을 싫어하여 여의려는 마음을 낼 때에 곧 세상의 즐거움을 구하고 이로 인해 마음을 바꾸어 온갖 복업을 닦을 것이다.
만일 그가 근기(根器)가 영리한 사람이라면 이 고통스러운 업을 듣고 그것을 싫어하여 여의려는 마음을 낼 때에 곧 해탈(解脫)을 구하고 이로 인해 마음을 돌려 도관(道觀)을 잘 닦아 곧 미혹한 가운데 세상을 벗어나는 인(因)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기를 "일체의 번뇌가 다 부처님의 종자이다"고 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괴로운 업을 알고 그 근본을 싫어하여 여의는 것은 선을 일으키는 인연인 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것을 말해야 한다. 만약 이 악한 업의 죄행을 말하지 않으면, 일체 중생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늘 실천하여 끊이지 않을 것이니, 비록 정견(情見)에 맞는 것이라 하더라도 모든 허물의 악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마음 밖에 따로 업의 고통이란 없는 것이니, 오직 경계가 없는 줄만 알면 마음은 항상 깨끗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였다.
"비록 탐욕의 허물을 말한다 하더라도 법에 탐할 만한 법이 있음을 보지 않고, 비록 진에(瞋?)의 허물을 말한다 하더라도 법에 성낼 만한 것이 있음을 보지 않으며, 비록 우치(愚癡)의 허물을 말한다 하더라도 모든 법은 어리석지도 않고 막힘이 없다는 것을 알며, 비록 중생들에게 세 갈래 악한 세계에 떨어지는 두렵고 무서운 괴로움을 보인다 하더라도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 등의 모습[相]이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글로써 죄행(罪行)의 원인과 결과는 오직 마음일 뿐이요, 그 밖에 다른 것은 없음을 증명하여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범부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감정에 맞추어 방편으로 반드시 업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다.
(4) 복행부(福行部)
이것은 복행을 밝힌 것으로서 앞의 죄행(罪行)에 대하여 이 복행을 말하는 것이다. 먼저 범부(凡夫)로서 욕계(欲界)의 선(善)을 닦는 사람은 다만 어지러운 마음으로 온갖 일의 복을 닦게 하면 결정코 하계(下界)에 태어나게 되는데 그것을 욕계의 업(業)이라고 말하며, 다섯 갈래 세계[道] 중에서 모두 다 일으킬 수 있다는 것들이다.
먼저 지옥에 대해 서술하겠다.
『아비담(阿毘曇)』에 의거하여 말하겠다.
"지옥의 사람들도 역시 세 가지 착한 업이 있다. 그것은 곧 의지(意地)의 세 가지 선근(善根)이다.
이것은 오직 성취하기만 할 뿐 현행(現行)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어려운 것이므로 법을 많이 듣지 않으면 생각으로 헤아려서[思量] 그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행이 없다.
만일 생득(生得)6)『성실론(成實論)』에 의하면 또한 지옥에도 선한 현행이 있다고 말했다. 비록 노력하는 일은 없으나 방편으로 선을 일으켜 성인의 도를 닦아서 성인의 도를 얻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생득(生得)의 선근이 있어야 선을 일으키나니, 이른바 중생들은 시작도 없는 과거로부터 여태까지 일찍이 세간의 신(信)·정진[進]·생각[念] 따위를 닦아 왔다. 그러므로 사견(邪見)을 일으켜 원인과 결과가 없는 것이라고 비방하기 전에는 이 선행은 사라지지 않는다.
『성실론(成實論)』에 의하면 또한 지옥에도 선한 현행이 있다고 말했다. 비록 노력하는 일은 없으나 방편으로 선을 일으켜 성인의 도를 닦아서 성인의 도를 얻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생득(生得)의 선근이 있어야 선을 일으키나니, 이른바 중생들은 시작도 없는 과거로부터 여태까지 일찍이 세간의 신(信)·정진[進]·생각[念] 따위를 닦아 왔다. 그러므로 사견(邪見)을 일으켜 원인과 결과가 없는 것이라고 비방하기 전에는 이 선행은 사라지지 않는다.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얻는 것을 생득선(生得善)이라고 말하나니, 이 선근에 의지하여 착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전생의 업이 있어서 인연을 느끼는 것이 강한 사람은 큰 성인이 나타나서 교화하고 그 괴로움을 멈추게 하기 위하여 도에 대한 법을 설명해 방편을 닦게 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축생이나 용 등에게도 선을 닦는 일이 있으니, 그것은 『열반경(涅槃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이치[義 : 교리]를 설명하실 때에 한량없이 많은 새와 짐승들이 보리심(菩提心)을 내어 천상(天上)에 태어났다."
또 『비담론(毘曇論)』에 의하면 이러하다.
"귀신과 축생의 열 가지 선행은 율의(律儀)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 몸과 입의 일곱 가지 선한 율의는 일체 중생들의 세계에 두루함으로써 귀신은 능히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살바다론(薩婆多論)』에서는 "축생들은 어리석고 둔하기 때문에 율의를 내지 못한다"고 하였고, 또 『성실론(成實論)』에서는 "귀신이나 축생 등도 계율을 얻는 일이 있다"고 하였다.
만일 인간에 대하여 말한다면 북방의 울단월(鬱單越) 사람들은 오직 의지(意地)의 세 가지 선한 업도(業道)만을 성취하지만 현행은 아니다. 그러나 선을 끊지 않기 때문에 겁(劫)이 다할 때에 이르면 사람들은 다 선정을 닦는데, 저들만은 유독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여의지 못한다. 그 이외의 세 방위의 사람들은 다 열 가지 착한 것이 있으나 갖추지 못한 이들도 있다.
또 욕계(欲界)의 여섯 하늘에 대하여 논한다면, 여기에는 출가(出家)나 별해탈계(別解脫戒)7)그러므로 『성론(成論 : 成實論)』에서 말하였다.
그러므로 『성론(成論 : 成實論)』에서 말하였다.
"천제석(天帝釋)은 대부분 여덟 가지 계(戒)를 받고 용(龍) 등도 그것을 받는다. 그래서 그것은 사람에게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색계(色界)의 여러 하늘들에 대하여 논한다면 『비담』에서 논한 것과 같다.
"상계(上界)에 태어나면 하계(下界)는 잃어버리므로 상계에서는 하계의 착한 업을 일으키지 않나니, 그 세계[界地]의 인과(因果)가 끊어지기 때문이며, 몸이 상계에 태어나면 하계의 법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루(有漏)에 의거한 것으로서 하계에 있으면 상계를 이룰 수 있지만, 상계에서는 하계를 잃게 되므로 곧 닦아 일으키지[修起] 못한다는 것이다.
또 『성실론』에 의하면 이러하다.
"상계에서는 하계를 성취하고 또한 겸하여 하계의 선한 업까지도 일으킬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여러 범천(梵天)들이 부처님을 뵙고 예배하고 찬양하는 말을 하는 것은 곧 선행을 흩어지게 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바로 욕계의 선한 업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또 『비담론』과 『비바사론(毘婆娑論)』 등에 의하면, "범천이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禮讚]은 욕계의 선행이 아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그 초선천(初禪天)에서 위의(威儀)와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소의(所依)의 무기(無記)는 선이 아니고, 밖의 몸과 입에 의거하면 이것은 상계의 색업(色業)인 것이다.
이상은 욕계 난선(亂善)의 복업(福業)은 몸에 의해 일어난다는 이치에 대해 밝힌 것으로서 여기에서 마친다.
두 번째는, 색계 사선천(四禪天)의 선정의 업이 몸을 의지하여 일어나는 이치를 밝히기로 한다.
만일 귀신이나 축생들 중에서도 성인의 강한 인연을 만나면 능히 도를 깨달을 수 있나니, 그들 또한 닦아서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무루(無漏)는 선정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근본은 없지만, 깊은 선정의 정체(正體)에는 반드시 거칠고 얕은 미래의 선정의 마음이 있으니, 이 미래의 선정은 바로 색계의 업이다. 이 미래에 의해 욕결(欲結)을 끊을 때에는 이 업은 초선천인 범천의 과보를 초래하게 된다.
만약 인간과 천상에 대하여 논하자면, 이들은 다 색계(色界)의 업을 닦는다. 즉 선정을 닦지 않는 북방의 울단월 사람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방위의 사람들과 욕계천은 다 색계의 열 가지 선업을 닦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른바 선정을 얻은 사람의 의지(意地)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탐욕이 없는 것과 성냄이 없는 것과 또 바른 견해를 말한다.
만일 몸과 입의 일곱 가지 선한 업을 논하면, 선정의 마음에 의하여 선정과 계율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선정과 계율은 곧 몸과 입의 일곱 가지 선행이다. 그러므로 선정을 얻었을 때에는 색계의 열 가지 선(善)이 있다.
만일 무색계(無色界)의 모든 하늘들에 의거해 논하면, 『비담론(毘曇論)』에서 이르기를 "무색계천은 색계 선정의 업을 닦아서는 일으킬 수가 없으니, 상계(上界)에 태어나면 하계(下界)를 버리게 되므로 계지(界地)가 끊어지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실론』에 의하면, "무릇 무색계에 태어나더라도 하계인 색계의 업을 일으킬 수 있다"고 했으니, 이것은 색계 선정의 복업(福業)인 열 가지 선한 업도(業道)가 몸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만일 무색계의 4공정(空定 : 四無色定)8)이상 여기까지는 모든 복행은 몸에 의해 일어난다는 이치에 대하여 밝힌 것으로서 여기에서 마친다.
이상 여기까지는 모든 복행은 몸에 의해 일어난다는 이치에 대하여 밝힌 것으로서 여기에서 마친다.
만일 성인의 복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 논한다면, 이것은 범부들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요, 바람[希望]이기 때문에 서술하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였다.
인(因)을 찾으면 길은 결국 다른데
취(趣)를 버리는 것은 그래도 가볍다.
고통이 지극하면 즐거움으로 돌아가기를 생각하고
즐거움이 지극하면 도리어 고통이 생긴다.
어찌 죄와 복이 다르지 않겠는가?
모두가 감정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만일 유루(有漏)의 업을 끊으면
언제나 법신(法身)의 광명을 보리.
감응연(感應緣)[간략하게 한 가지 증험만을 인용하였다.]
당(唐)나라 무덕(武德 : 高祖의 年號, 618∼626) 때에 수주(遂州) 총관부(摠管府) 기실(記室)9)"관리에게 붙들려 관가에 갔더니 거기서 물었다.
"관리에게 붙들려 관가에 갔더니 거기서 물었다. '너는 왜 소 두 마리를 죽였느냐?'
내[孔恪]가 말하였다.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관리가 말하였다. '네 아우가 네가 소를 죽였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내가 말하였다. '그러면 왜 아우를 부르지 않습니까?'
그러자 곧 내 아우를 불렀는데, 아우는 죽은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난 때였다. 아우가 오자 관리는 그에게 형틀을 씌우고 매우 준엄하게 고문하면서 아우에게 물었다.
'너는 네 형이 소를 죽였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거짓이냐 사실이냐?'
아우가 말하였다. '형이 전에 사신의 임무를 받들고 요적(?賊 : 오랑캐)을 불러 위로할 때 나를 시켜 소를 잡게 하여 연회를 열었습니다. 실은 나는 형의 명령을 받들었을 뿐, 내가 죽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였다. '아우를 시켜 소를 잡게 하여 잔치를 베푼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라를 위한 일인데 제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관리가 말했다. '네가 오랑캐들을 불러 소를 잡아 대접하고서 그 공(功)으로 인하여 벼슬을 구하고 상을 받으려고 한 것이니,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어찌 그것을 나라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인해 내 아우에게 말하였다. '너는 형의 일을 증명하기 위해 여기에 오래 붙들어 두고 있었다. 형이 너를 시켜 소를 잡은 것이니 너는 죄가 없다. 이제 너를 놓아주는 것이니 마음대로 가서 살아라.'
그 말이 끝나자 아우는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할 말을 다하지 못했다. 관리는 다시 나에게 물었다. '너는 무엇 때문에 왜 또 오리를 두 마리나 죽였는가?'
내가 말하였다. '전에 현령(縣令)으로 임관되었을 적에 오리를 잡아 관아에 온 손님을 대접했을 뿐인데, 그것이 어찌 나의 죄가 됩니까?'
관리가 말하였다. '관아에 손님으로 온 그 관리는 급료(給料)를 받고 있었으나 오리가 없었으므로 네가 오리를 잡아 그를 대접한 것이었다. 그것은 너의 아름다운 명예를 위한 것이었으니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또 계란 여섯 개를 삶아 먹었느냐?'
내가 대답했다. '나는 평생 동안 계란은 먹지 않았습니다. 오직 내 기억으로는 내 나이 아홉 살이 되던 때 한식 날 어머니가 계란 여섯 개를 주어 그것을 삶아 먹은 것뿐입니다.'
그러자 관리가 말하였다. '그러면 그 죄를 어머니에게 추국(推鞫)하란 말인가?'
내가 말하였다. '감히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다만 그 연유를 말했을 뿐입니다. 그 계란은 제가 삶아 먹었습니다.'
관리가 말하였다. '너는 남의 목숨을 죽였으니, 당연히 그 죄를 네가 받아야 할 것이다.'
말을 마치자, 갑자기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몰려와서 나를 붙잡아 끌고 나갔다. 나는 큰 소리로 외쳐대면서 말하였다. '관부(官府)도 또한 크게 잘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 억울합니다.'
관리가 이 말을 듣고 다시 불러 물었다. '무엇이 억울하단 말이냐?'
내가 말하였다. '지금까지의 죄는 조금도 빠뜨리지 않고 따지면서 지금까지 닦아 온 복은 전혀 그 기록이 보이지 않으니, 어찌 억울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관리가 주사(主司)에게 물었다. '공각에게 무슨 복이 있느냐? 어째서 그 일은 기록하지 않았느냐?'
주사가 대답하였다. '그가 지은 복도 다 기록하였습니다. 다만 죄보다 복이 적기 때문입니다. 만약 복이 많고 죄가 적었다면 먼저 복을 받게 하겠지만, 죄가 많고 복이 적으면 먼저 죄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공각이 지은 복은 적고 죄는 많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 복은 논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관리가 화를 내어 말하였다. '아무리 죄를 먼저 받는다 하더라도 어찌 그 복을 들추어내어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리고는 명하여 주사에게 백 대의 매를 때리게 하였다. 그러자 피가 흘러 땅을 흥건하게 적셨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야 주사는 내가 지금까지 지은 복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드러내어 보였다.
관리가 나에게 말하였다. '너는 먼저 죄를 받아야 한다. 나는 다시 7일 동안 말미를 주어 너를 돌려보낼 터이니, 부디 그 동안 부지런히 복을 짓도록 하라.'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전송하게 하였다. 그래서 나는 깨어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말하고 공각은 그 때부터 승니(僧尼)들을 많이 모으고 도를 닦으면서 참회하고 부지런히 고행(苦行)하였다. 7일이 되자 공각은 집안 식구들에게 하직을 고하고 조금 있다가 목숨을 마쳤다.
이상은 임(臨)의 형이 수부(遂府)의 권속을 위해 부탁하여 자세히 적은 것이다.[이 한 가지 증험은 『명보기(冥報記)』에서 나온 것이다.] ....
첨부 파일에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