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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등록일 : 2003-10-22 오후 8:2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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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
화엄경탐현기 제5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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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 20권 중 제 5권
화엄경탐현기 제5권
위국 법장 한역
노혜남 번역
9. 불승수미정품(佛昇須彌頂品)
장차 이 경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네 개의 문이 있으니 위에서와 같다.
첫째 이름을 해석함이니, 두 가지가 있다.
처음 회(會)의 명칭이라는 것은 법을 기준으로 하면 10주회(住會)라고 이름하고, 처소[處]를 기준으로 하면 도리천회라고 이름한다. 이에 준거하여 해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둘째 품의 명칭[品名]이라는 것은 부처님은 화주(化主)이시다. 동(動)과 정(靜)에 걸림이 없어서 가지 않고도 나아가는 까닭에 승(昇)이라고 한다. 올라서 어느 곳에 이르렀는가. 수미정(須彌頂)을 말한다. ‘수미(首彌, sumeru)’라는 것은 여기 말로는 묘고산(妙高山)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네 가지 보배로써 이루어지는 까닭에 묘라고 한다. 이를테면 동쪽은 황금, 서쪽은 백은, 남쪽은 파리, 북쪽은 마노이다. 나머지 산은 오직 금뿐이므로 묘(妙)가 아니다. 9산(山)1)에 독출하는 까닭에 고(高)라고 말한다. 높이는 8만 4천 유순이다. 세로와 가로가 바로 같으므로 또한 안명산(安明山)이라고도 이름한다. 정(頂)이라는 것은 산의 꼭대기이다. 이를테면 이 산의 꼭대기의 중앙에 제석궁이 있고 사면에 각각 8타(埵)가 있는데 마치 대(臺)와 같다. 제석궁에서 거리가 3유순이며, 중간에 따로 궁성이 있다. 32천은 제석을 보필하나니, 제석을 합하여 삼십삼이 된다. 여기에서는 제석궁에 나아가는 까닭에 꼭대기라고 말한다. 처소를 기준으로 해서 법을 표하면 10주이니 위(位)에서 물러나지 아니하는 뛰어남을 이룸을 밝히는 까닭에 산꼭대기에 거주한다. 곧 사람과 용(用)과 처소2)의 3의(義)를 따라서 이름을 세웠다.
[문] 어찌하여 인간에 대해서는 설하지 않았는가?
[답]행과 위가 점점 승진(昇進)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까닭이다. 또 위(位)를 이루어 염(染)을 여의는 것을 표한 까닭에 하늘[天]에 거주한다.
[문] 어찌하여 사천왕천에 이르지 않는가?
[답]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 거기는 곧 여러 귀신들의 하늘이기 때문에 법을 나타냄에 뛰어나지 아니한 까닭에 초과(超過)하였다. 둘째는 법을 붙이기 위함이니, 10신(信)은 이 외범의 퇴위(退位)이고 10주(住)는 곧 내범(內凡)의 불퇴위이기 때문에 나아감과 물러남이 현격히 다름을 나타내고자 하는 까닭에 사천왕의 처소를 뛰어넘었다. 셋째는 만약 아직 산꼭대기에 이르지 못했으면 진퇴가 있을 수 있지만, 산꼭대기에 이르면 곧 안주하여 물러나지 아니하기 때문에 저 산허리에 처하는 하늘을 넘어서 이 꼭대기에 이른 것으로써 법을 표하였다.
둘째 온 뜻에 대해서도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처음에 회(會)의 옴이란 것은 첫째는 앞의 10주에 대한 물음을 답했기 때문이요, 둘째는 앞에서 이미 신(信)을 밝혔으므로 여기서는 신에 의해서 해(解)를 일으킴을 나타내고자 한 까닭에 다음에 왔다. 셋째는 앞의 신은 다만 위(位) 전의 방편이고 방편이 이미 원만하였기 때문에 정위(正位)를 드러내는 까닭에 다음에 온 것이다.
두 번째 품이 옴[品來]이라는 것은 앞의 품은 신의 구경(究竟)을 밝혔기 때문에 여기서는 장차 후위(後位)에 나아가고자 하였으므로 온 것이다.
셋째 종취(宗趣)에도 또한 두 가지가 이다.
처음에 회종(會宗)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다. 먼저는 사람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이를테면 교화의 주체[化主]와 교화를 돕는 이[助化]에 각각 체ㆍ상ㆍ용이 있음은 주(住)를 기준으로 하여 여기에 준거하라.
둘째는 법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이를테면 10주의 교(敎)와 의(義)이다. 의(義) 가운데서는 평등법계로써 체를 삼고, 10주의 행위를 상으로 삼으며, 교에 응하는 소전(所詮)을 용으로 삼는다. 교에서는 6결정(決定)3)으로써 체를 삼고, 10주의 부동(不同)을 상으로 삼으며, 중생을 이익되게 함을 용으로 삼는다. 상즉하여 걸림이 없으니 위에 준거하여 생각하라.
두 번째 품의 종(宗)이라는 것은 처소를 장엄하고 부처님을 청할 때 여래가 감응[感]에 나아감으로써 종을 삼는다.
넷째 본문을 해석한다는 것은 이 회상 가운데 나아가서 6품이 있다. 이를 둘로 나누면 처음 두 품은 방편의 발기를 밝혔으니, 곧 서분(序分)이다. 나머지 네 품은 이 당회(當會)의 정종(正宗)이다.
앞의 것 가운데 둘이 있으니 초품은 곧 여래응감(如來應感)의 서(序)이니 과덕(果德)의 갖춤을 밝혔고, 후품은 집중광찬(集衆光讚)의 서를 밝혔고 인덕(因德)의 원만함을 밝혔으니 곧 10주위 가운데 인과를 갖추어 원만하게 갖추어짐[圓備]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앞의 것 가운데 셋이 있으니 처음은 화연(化緣)을 밝혔고, 두 번째 ‘그 때 제석’ 이하는 근욕(根欲)을 장엄했으며, 세 번째 ‘그 때에 세존’ 이하는 근(根)과 연(緣)의 계합을 밝혔다.
처음 가운데 둘이 있다. 먼저는 체가 융합하여 법계에 널리 두루함이요, 뒤는 용이 융합함을 밝혔다. 이를테면 움직이지 않고 나아감이다.
앞의 것 가운데 처음 한 구는 체가 융합한 소유(所由)를 밝힘이니 불력(佛力)을 말한다.
아래는 융통하여 두루한[融遍] 모양을 밝혔으니, 그 가운데 ‘시방에 각각 하나하나의 염부(閻浮)’라는 것은 곧 위의 「광명각품」에서 밝힌 바 “시방의 각각, 나아가 불가설 불가설의 허공법계와 같은 세계 가운데 모두 보리수 아래에 노사나불이 각각 해회(海會)의 보살 대중과 함께 문수사리, 나아가 현수 등에게 다 각각 법을 설한 것과 더불어 여러 모임의 대중들은 각기 섞이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부처님 처소에 있다”라고 하였다.
이제 아울러 동시에 대중을 모아서 각각 본세계[本界]의 천상에 올라서 본처를 떠나지 않는다. 만약 소승과 삼승 가운데 경을 설하여 교화를 베푸는 것을 기준으로 하면, 다만 모처(某處) 등에 있음을 논하고 이 일설일체설 등은 없다. 지금은 일승의 법을 밝히고자 하니, 곧 주반이 원명(圓明)한 까닭에 법이 이와 같은 것이다. 그 가운데 첫째는 3세간이 융합함이요, 둘째는 의보와 정보가 융합함이요, 셋째는 정보 가운데 3보가 서로 융합함이 있다. 이를테면 갖가지를 설한 것으로 법보를 삼고 보살을 승(僧)으로 삼으니 여래에 대하는 까닭이다. 넷째는 모든 보살에 3업이 융합함이 있다. 이를테면 현현이라는 것을 곧 몸[身]으로 삼고, ‘법을 설함’을 말[語]로 삼으며, ‘스스로 말함’을 뜻[意]으로 삼는다.
[문] 어찌하여 모름지기 여기에 모여야 하는가?
[답] 주반을 구족함을 밝히고자 함이다. 무릇 한 법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일체를 갖추는 까닭이다.
[문] 무슨 까닭에 다 보리수로써 근본을 삼는가?
[답] 이 법을 얻은 처음의 처소이기 때문이다. 또 이것은 깨달음의 문인 까닭이다.
두 번째 작용이 융합하는[用融] 가운데 처음 한 구는 작용이 융합하는 소유(所由)이고, 다음 ‘불기(不起)’라는 것은 바로 작용의 모양[用相]을 밝혔다.
이 가운데 여기에서 일어나지 않고 저기에 오른다는 것은 고인이 세 가지로 해석하였다.
첫째 이르되 “본래 석가의 몸은 도수(道樹)에서 일어나지 않고 따로 응화(應化)를 일으켜서 천상에 올랐다”라고 하니, 만약 이 해석에 의하면 하늘에 오른 몸은 곧 중화(重化)의 몸이다. 이미 심묘(深妙)가 아니니 아마도 경문의 뜻과는 어긋나는 듯하다.
어떤 이는 이르되 “일어나지 아니함은 곧 법신이고 하늘에 오름은 곧 화용(化用)이다”라고 하니, 이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 듯하다. 어찌 법신이 도수에 앉을 수 있겠는가.
어떤 이는 이르되 “이 하늘에 오른다는 것은 감이 없이 이름[到]이다. 감이 곧 감이 아니기 때문에 일어나지 아니함이요, 감이 아님이 곧 감이기 때문에 하늘에 오름이다. 옴이 없는 모습으로 옴을 선래(善來)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니, 만약 이 해석에 의하면 다만 오르는 모습이 없이 하늘에 오르고 나무 아래에 일어나지 않는 몸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또한 수용하기 어렵다.
이제 이 경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간략히 여덟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처소의 즉입문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이를테면 일처 가운데 일체처가 있기 때문에 이 천궁 등은 곧 본래 저 수왕(樹王)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기(不起)라고 이름한다. 그러나 앞에서는 아직 이 천궁의 처소를 수용하지 않았지만 여기에서는 법을 설하고자 하여 쓰는 까닭에 설하여 오름[昇]이라고 한다. 또 상즉인 까닭에 불기이다. 문(門)이 다른 까닭에 오름이 있다.
둘째는 부처님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이를테면 이 수왕 아래에 앉아 계신 불신은 곧 법계 일체처에 두루하기 때문에 불신은 본래 저 도리(忉利) 등의 처소에 있으므로 일어나기를 기다리지 아니한 것이다. 이제 이 도리문(忉利門) 가운데 부처님을 수용하고자 한 때문에 오른다고 말했다. 이런 까닭에 만약 일어나면 곧 오름을 이루지 못한다.
셋째는 시(時)를 기준으로 한 것이니, 이를테면 이 나무 아래 자리 위의 불신은 곧 전후제 등 9세ㆍ10세의 모든 때[時]에 두루하기 때문에 이 부처님은 나무 아래 앉을 때와 하늘에 올라갈 때와 하늘 처소에 도착할 때마다 모두 법계에 두루하여 전후제를 섭수해서 다하는 것이다. 곧 알아야 한다. 나무 아래에 앉을 때가 곧 영원히 일어남이 없는 때이므로 불기라고 말한 것이다. 만일 바로 갈 때에도 또한 이와 같다. 그러므로 오직 가는 것만 있고 남는 것은 없다. 모두 생각생각마다 서로 이르지 못하지만 각각 법계를 거두어들인다. 이와 같은 연기문은 걸림이 없어서 항상 섞이지 않는다.
넷째는 법계문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이를테면 이 올라감은 자성이 없는 것이므로 곧 진여법계를 섭수하고 저 나무 아래에 앉는 것 등도 또한 진(眞)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진여와 같고 가는 문에 있어서 현현하는 까닭에 일어나지 않고 오르는 것이다.
다섯째 연기문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이를테면 앉음[坐]은 감[行]에 말미암는 것이므로 앉는다고 말한다. 앉음은 감 속에 있고 감은 앉음으로 말미암는 까닭에 감이라고 하나니, 감은 앉음 가운데 있다. 이런 까닭에 감 가운데 앉음[行中坐]을 말미암으므로 하늘에 오르는 것이 곧 일어나지 아니함이다. 앉음 가운데 감[坐中行]으로 말미암는 까닭에 일어나지 않고 하늘에 오른다. 감과 앉음이 걸림이 없는 까닭에 오름에 즉하여 항상 앉음이요, 앉음에 즉하여 항상 오름인 것이다.
여섯째는 부처님의 부사의한 덕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이를테면 곧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곧 가고 누우며 머무르고 일체처에 이르며 모든 일을 지으므로 이 모두는 하지(下地)에서는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일곱째는 표하는 바[所表]를 기준으로 한 것이니, 이를테면 전위(前位)의 행이 이루어져 구경에 견고하여 무너지지 아니함을 표하는 까닭에 앞의 자리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중생에 나아가는 작용이 있는 까닭에 오른다고 말했다.
여덟째는 성회(成會)를 기준으로 한 것이니, 이를테면 뒤의 회[後會]는 반드시 앞의 것을 갖추는 까닭에 앞의 것을 버리지 않고 뒤를 이룸이니, 만약 버린다면 이는 곧 연기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앞에서 일어나지 않고 뒤에 오른다고 했다.
두 번째 근욕(根欲)을 장엄하는 가운데 ‘멀리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본다’라는 것은 부처님을 기준으로 하면 용은 체를 따라서 일어나고, 중생[機]을 기준으로 하면 경계[境]는 마음을 따라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둘이 있다. 먼저 자리를 장엄한다는 것은 상(相)을 표함이니, 이 가운데 먼저는 총(總)이요 뒤는 별(別)이다. 별 가운데 처음은 외보(外報)이고 나중은 내보(內報)이다. 그 다음의 ‘합장(合掌)’ 이하는 욕(欲)을 밝혔다.
세 번째 근연계합(根緣契合) 가운데도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전(殿)에 오르는 이익이고, 뒤는 자리에 오르는 이익이다.
앞의 것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감(感)에 나아가고 뒤는 이익을 이룸이다. 이 두 가지에 각각 두 가지씩이 있다. 이를테면 이 세계와 통틀어 매듭 지음이다. 이익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적연(寂然)’ 등이라는 것은 선정을 얻는 이익을 보인 것이고, 뒤에 게송으로써 찬탄한 것은 지혜를 발하는 이익이다. 이 가운데 둘이 있으니, 처음은 본행을 기억하고 다음은 덕을 나타냄을 송하였다.
송(頌) 가운데 이실(理實)에는 과거의 모든 부처님은 체도 같고 용도 융합하여 법이 그러하여[法爾] 둘이 없으며 모두가 이 전(殿)에서 10주법을 설하였다. 이제 문득 다음에 다만 십불만을 설한 것은 무진을 나타내기 위한 까닭이며 10주를 설하기 위한 까닭이다.
‘가섭(迦葉)’이라는 것은 성(姓)이니, 여기 말로는 음광(飮光)이라고 말한다. ‘구나함모니(拘那含牟尼)’라는 것은 여기 말로는 금선인(金仙人)이라고 하며, ‘구루손(拘樓孫)’이라는 것은 여기 말로는 소응단이단(所應斷已斷)이라고 하나니 이를테면 생사와 번뇌 등이다. ‘수섭(隨葉)’이라는 것은 또한 비사부(毘舍符)라고 이름하니, 여기 말로는 일체승(一切勝)이라고 하며, 또한 변현(遍現)이라고도 한다. 이를테면 모든 곳[諸處]에서 다 몸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시기(尸棄)’라는 것은 여기 말로는 유계(有髻)라고 한다. ‘비바시(毘婆尸)’라는 것은 여기 말로는 종종견(種種見)이라고 하고, 신역에서는 정관(淨觀)이라고 한다. ‘불사(弗沙)’라는 것은 여기 말로는 증성(增盛)이라고 하니 모자람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별[星]의 이름이다. ‘제사(提舍)’라는 것은 여기 말로는 설(說)이라고 하니 이를테면 항상 법을 설한다는 뜻이요, 또한 광(光)이라고도 이름한다. ‘파두마(波頭摩)’라는 것은 여기 말로는 적연화(赤蓮華)라고 한다. ‘정광(錠光)’이라는 것은 연등불이니, 이 부처님께서 태자로 태어났을 때 일체의 신변(身邊)이 연등과 같이 되었기 때문에 연등 태자라고 이름하고 태자가 성불하였을 때에도 또한 이 이름을 세웠다.
[문] 이 가운데 뒤의 일곱 부처님은 곧 과거 장엄겁 때의 부처님인데 무슨 인(因)으로 이 현겁 가운데 도리천궁에서 법을 설할 수 있는가?
[답] 이 천궁 등에는 추(麤)가 있고 세(細)가 있다. 추한 것은 앞의 겁에 소멸했고 세한 것은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경에서 “천인(天人)이 겁이 다함을 볼 때에도 나의 이 땅은 항상 안온하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삼승에 설한 것은 멸하고 일승에서 밝힌 것은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자리에 오르는 이익 가운데에도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처음은 이 국토이고 다음은 통틀어 매듭 지음이다. 앞의 것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요, 뒤에서는 이익을 밝혔다. 이를테면 그 전(殿)을 넓게 한다는 것은 항상 보는 것을 고치기 때문에 생각[情]을 파하는 것이다. 같은 하늘의 처소라는 것은 이치가 같다는 것을 나타내는 까닭이다. 앞은 전(殿)에 올라서 사람을 이익되게 했고, 여기서는 자리에 올라서 처소를 이익되게 하였으니, 의(依)와 정(正)이 함께 뛰어남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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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산(山)이란 첫째 묘고, 둘째 지상(持悉), 셋째 지축(持軸), 넷째 첨목(檐木), 다섯째 선견(善見), 여섯째 마이(馬耳), 일곱째 상이(象耳), 여덟째 지(持), 아홉째 철륜(鐵輪)의 아홉 산을 말한다.
2) 사람은 부처님을 말하고, 용(用)은 오름이고, 처(處)는 수미정을 말한다.
3) 6결정이란 첫째는 관상선결정(觀相善決定), 둘째는 진실선결정(眞實善決定), 셋째는 승선결정(勝善決定), 넷째는 인선결정(因善決定), 다섯째는 대선결정(大善決定), 여섯째는 불법약선결정(不法略善決定). 상세한 것은 『십지경』 권1과 『탐현기』 권9를 참조.
첨부 파일에 계속 됩니다.
* 백련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3-12 16: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