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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 |
관리자 [등록일 : 2003-10-22 오후 8:3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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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
화엄경탐현기 제10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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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 20권 중 제 10권
화엄경탐현기 제10권
법장 지음
심재열 번역
22. 십지품(十地品) ②
이 이하는 해탈월보살의 두 번째 청이니, 이 가운데 둘이 있다. 먼저는 장행(長行)이고, 뒤는 게송이다.
앞의 것 가운데 셋이 있으니, 처음은 총체적인 것으로 청함을 아뢰는 것이고, 둘째 ‘이 큰 보살’ 이하는 대중을 찬탄하여 바로 청하는 것이고, 뒤의 ‘그러므로’ 이하는 청을 매듭 지은 것이다.
바로 청한 것 가운데 나아가 열 구가 있다. 첫째, ‘곧은 마음이 청정하다’는 것은 곧 총체적으로 말한 구이니, 깊은 법을 바로 생각하는 것이므로 ‘곧은 마음’이라 했고, 모든 잡되고 더러운 것을 여의었기 때문에 ‘청정하다’고 했다.
아래 아홉 구는 따로 해석한 것이니, 앞의 다섯은 곧 교법[阿含]의 청정함이요, 뒤의 넷은 곧 깨달음의 청정함이다. 말하자면 교법에 수순해서 수행하는 것을 ‘교법의 청정함’이라 이름하고, 이치를 깨닫고 행을 일으키는 것을 이름해서 ‘깨달음의 청정함’이라 한 것이다. 또 지전(地前)에서 수행하는 것을 ‘교법의 청정함’이라 이름하고, 지상(地上)에서 성취한 것을 이름해서 ‘깨달음의 청정함’이라 한 것이다.
아함의 다섯 가지 가운데 처음인 ‘의욕이 청정하여 생각하는 바를 따르는 교법’이라 하는 것은 바로 구하는 법이니, 하나가 아니므로 ‘곳을 따른다’고 했다. ‘방편으로 생각하여 얻는 깨달음의 청정함’이라 한 것은 바로 구하는 이의 마음이며, 경에서 “보살도를 잘 수순하는 이라 이름한다”고 한 것은 들은 바의 법을 생각하고 교에 수순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둘째, 이 논 가운데 네 번째는 나면서 얻는 청정함이니, 곧 출세간의 뛰어난 과보를 ‘상상생(上上生)’이라 이름하는데, 지전(地前)에서 조도(助道)의 행을 일으켜서 저 생(生)을 얻을 것을 원했으므로 이름하여 ‘뛰어난 생각’이라 했다. 그러므로 조도의 법을 잘 모았다고 하는 것이다.
셋째는 이것이 청정함을 구하는 것이니, 몸과 입의 공경으로서 구법의 행을 일으키기 때문에 공경스런 행이라 이름한 것이다. 모든 부처님께 수순(隨順)하여 법을 구하기 때문에 수순이라 한 것이니, 그러므로 능히 모든 부처님을 잘 공경하고 공양한다고 한 것이다.
넷째, ‘받아 지닌다’는 가운데 먼저는 받는 것을 해석했고, ‘한량없는 세상’이라 한 것은 들은 지가 오랜 것이며, ‘많이 들었다’라고 하는 것은 들은 것이 넓은 것이다. 아래는 지니는 것을 해석한 것이요, ‘기억해 지닌다’라고 하는 것은 잘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며, ‘말이 틀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조금도 착오가 없는 것이니, 마치 경에 “한량없는 부처님께 많은 선근을 심었다”고 한 것이 많은 부처님을 친근히 해서 바른 법을 듣고 지니는 선근을 심은 것과 같다.
다섯째, ‘행의 청정함’이라는 것 가운데 지상(地上)의 참다운 깨달음의 법을 구하기 위한 까닭에 적은 욕심과 두타(頭陀)의 집착을 여의는 행을 익히고 행함으로 많은 공덕을 쌓아 모음을 이룬다. 그리고서야 비로소 10지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한량없이 깊고 두터운 공덕을 이룬다’고 한 것이다.
아래는 깨달음이 청정함을 밝힌 것이니, 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 ‘청정함을 얻었다’는 것은 초지에서 참다운 깨달음을 얻은 것을 말하며, 처음 도를 본 참다운 지혜를 가지고 뚜렷하게 관하고[現觀] 결정해 가려내어[決擇] 바르게 깨닫는 것[正證]이다. 그러므로 ‘드러난 지혜가 결정하기 때문에’라고 하였다.
또 다른 해석이 있으니, 법이 마음을 나타내는 것을 이름해서 ‘나타낸 지혜’라 하고, 마음이 법에 편안히 머무는 것을 이름해서 ‘결정’이라 한다. 경에서 “어리석음을 여읜다”고 한 것은 곧 나타난 지혜이며, “의심과 뉘우침을 여읜다”고 한 것은 곧 잘 결정하는 것이다.
둘째, 행하지 않는 청정함이라 한 것은 수도위(修道位) 가운데서 저 일체의 크고 작은 번뇌를 멸하여 길이 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탐(貪) 등이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견도위(見道位)에서 의혹을 끊고 이치를 보는 뜻이 더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수도위에서는 거듭 진리를 관하여 장애를 없애는 뜻이 더하기 때문에 치우치게 설한 것이다.
셋째, ‘싫증냄이 없는 청정함’ 가운데 아래에 대해서 벗어남을 나타낸 것을 ‘소승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이름하고, 위를 바라보고 들어감을 나타낸 것을 ‘뛰어난 데 오르기 때문에 바람을 얻는다’고 이름한다. 거듭 해석한 가운데 ‘다시 저 공덕을 생각하고 지니기 때문에’라고 한 것은 저 불과(佛果)의 공덕을 생각하고 기억해 지님으로 잊지 않는 것을 일컬음이니, 경에서 “편안히 머문다”고 함을 해석한 것이다.
또 저 능히 대응해서 다스리는 공덕을 생각해서 항상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넷째는 ‘다른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청정함’이니, 이른바 계위가 구경도(究竟道) 가운데 있음을 ‘취진도(趣盡道)’라 이름하고, 보살도가 지극함을 이름해서 ‘다했다’고 하였다. 깨달아야 할 것을 스스로 마음을 열어서 깨달아 나타내 보임을 이름해서 ‘스스로의 바른 행’이라 하니, 그러므로 ‘다른 가르침에 따르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이 이하는 셋째 청함을 매듭 지은 것이다. 이 가운데 두 구가 있으니, 처음은 부처님의 힘을 이어서 설한 것을 청한 것이고, 뒤는 대중이 능히 깨달아 앎을 찬탄한 것이다.
둘째, 게송에 나아가서는 처음 게송은 법을 들어서 청한 것이니, 위의 반은 법을 들어서 설할 것을 원한 것이고, 아래의 반은 설하면 유익함을 밝힌 것이다. 뒤의 게송은 대중을 찬탄하여 청하는 것이니, 위의 반은 교법의 청정함[阿含淨]을 읊은 것이고, 아래의 반은 깨달음의 청정함[證淨]을 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셋째, 청함 가운데 둘이 있으니, 처음은 금강장보살이 손해됨을 들어서 어긋난 까닭을 밝혔고, 뒤는 해탈월보살이 이익됨을 찬탄하여 거듭 청함을 밝혔다.
앞의 것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장행이고 뒤는 게송이다.
앞의 것 가운데 둘이 있으니, 먼저는 앞에서 찬탄한 것을 거느려서 얻음을 든 것이지만 잃음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이라고 한 것이다.
둘째, ‘그 나머지는 작은 법을 좋아한다’ 이하는 손해됨을 들어서 어긋났음을 가리킨 것이다. 이 가운데 세 구가 있으니, 첫째는 선을 무너뜨리는 손해이고, 둘째 ‘이 사람’ 이하는 즐거움을 잃는 손해이다. 또 먼저는 고의 원인을 이루는 것이고, 뒤는 고의 결과를 얻는 것이다. 셋째, ‘나는……을 불쌍히 여긴다’ 이하는 잠자코 있는 뜻을 매듭 지은 것이다. 또 저 다른 곳에서 그 뒤의 소승의 대중을 가리켜서 나머지라고 한 것이니, 이 모임 가운데는 이런 소승의 무리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이 지전(地前)의 결정되지 못한 종성으로 일향되게 보살의 도를 닦을 수 없기 때문에 ‘소승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논의 해석 가운데 세 구가 있다. 먼저는 잠자코 있었던 뜻을 해석한 것이니, 소승을 좋아하는 중생에게 이 법기(法器)가 있음을 보지 못하고 법기가 없으므로 듣고도 의혹을 더하게 됨을 말한 것이다.
둘째, 처음 구를 해석한 것이니, 그 가운데 ‘바른 행과 서로 어긋나는 뜻을 의심하여 결정하지 못한다’라고 하는 것은 의심하는 것이 바른 행을 방해하는 것이며, ‘마음이 뜻을 미혹한다’는 것은 미혹이 앎을 장애하는 것이다.
다음은 허물[過失]을 나타낸 것이니, 곧 의심이 있기 때문에 먼저 닦는 바를 무너뜨리는 것을 ‘선법(善法)을 무너뜨렸다’고 이름한 것이고, 미혹이 있기 때문에 일향되게 행하지 못하는 것을 ‘선법을 멀리 여의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이하는 제2구를 해석한 것이니, 의심하기 때문에 바른 행을 받을 수 없고 미혹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뒤로 물러남을 받는 것이니, 이로써 인(因)을 삼기 때문에 저 생사를 받는 것이다. 긴 밤[長夜]에 흘러 다니며 즐거움이 없기 때문에 쇠한다고 한 것이며, 고(苦)가 있기 때문에 괴롭다[惱]고 한 것이다.
둘째, 게송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처음 한 게송 반은 앞에서 찬탄한 것을 거둔 것을 읊은 것이니, 교법을 따라서 믿음을 굳건히 하기를 수미산처럼 하고 마음을 선정에 두어 이치를 깨달으므로 어지럽지 않음이 바다와 같은 것을 일컫는다.
뒤의 한 게송 반은 앞에서 거론한 손해에 대하여 어긋남을 읊은 것이다. 그 가운데 처음 네 구는 무너뜨린 선(善)의 손해됨을 읊은 것이다. 경에 말하기를 “모양을 취하는 것을 알음알이[識]라 이름하고, 모양을 취하지 않는 것을 지혜라 이름한다”고 했다.
또 분별하는 것을 ‘알음알이’라 이름하니, 말을 따라서 뜻을 취하기 때문이다. 분별하지 않는 것을 지혜라 이름하니, 말을 여읜 법을 깊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구는 쇠하고 괴롭힘[惱] 등을 읊었으며, 뒤의 한 구는 잠자코 있는 뜻을 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둘째, 해탈월보살의 청 가운데 둘이 있으니, 이른바 장행과 게송이다. 앞의 것 가운데 또한 둘이 있으니, 먼저는 바로 청하는 것[正請]이고, 뒤는 청함을 매듭 지은 것[結請]이다.
앞의 것 가운데 셋이 있으니, 첫째 부처님의 위신력을 잇고자 원하는 것이라 하는 것은 총상(總相)으로 설할 것을 권함으로 앞에서의 잠자코 있었던 뜻을 뒤집은 것이다. 둘째, ‘부처님께서 호념(護念)해 주심으로’ 이하는 부처님의 힘으로 가호하시어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알게 함을 밝혀 이로써 앞의 의혹을 뒤집는 것이다. 셋째, ‘일체의 보살’ 이하는 10지의 법이 요긴하고 뛰어남을 설하면 반드시 많은 이익이 있음을 밝힌 것이니, 앞에서의 쇠하고 괴로웠던 것을 뒤집은 것이다.
처음 가운데 ‘부처님의 힘을 이어서 설할 것을 권한다’라고 하는 것은 대중이 힘을 이어서 들을 수 있게 됨을 밝힌 것이다. ‘잘 분별한다’라는 것은 이치에 따라서 설하게 하기 때문이며, ‘부사의한 법’이라는 것은 이 10지의 법을 밝힌 것이니, 비록 비방으로 인해서라도 듣기만 하면 오히려 이익을 얻게 되기 때문에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
둘째, 글 가운데 둘이 있으니, 처음은 표방하였고 뒤는 해석한 것이다. 표방한 것 가운데는 이 지의 법이 비록 부사의하지만 부처님의 힘으로 가호하면 반드시 쉽게 믿을 수 있게 됨을 밝혔다. 해석 가운데 이 10지의 법을 이름해서 부처님이 호념해 주시는 일이라 한 까닭을 해석했으며, 시방세계 가운데 단지 10지만을 설하여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으레 호념해 주시는 것이 위에서 말한 가분(加分)과 같은 것임을 해석했다.
셋째, 글 가운데 넷이 있다. 처음은 근본 취지[宗]를 세우는 것이니, 모든 보살이 이와 같이 10지의 일을 보호해 지니기 때문에 부지런히 행하고 정진하는 것이 마치 아래에 있는 다른 세계에서의 깨달음을 이룸 등을 말한 것과 같음을 일컫는다.
둘째는 원인[因]을 찾아내는 것이니, 무엇 때문에 보살이 한가지로 이 법을 보호하느냐 하면 ‘이 보살의 가장 으뜸가는 행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에서 ‘위[上]’라 하는 것은 우두머리[首]란 뜻이니, 머리란 곧 처음[初]이란 뜻이다. 논과 경에서 제일 처음의 행이 바로 아함행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일체의 불법에 도달함을 얻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곧 깨달아 얻은 행이기 때문이다. 셋째, 비유를 든 가운데 ‘처음 글[初章]’이란 곧 실담장(悉曇章) 가운데 처음 글자인 아(噁)․아(阿) 등 열두 음을 가리키고, 혹은 이(唎)․이(離) 등을 더해서 열네 음이 되기도 하는데 곧 글자의 인연[字緣]이라 하겠다. 또 가(迦)․카(佉) 등 서른여섯 자는 글자의 세계이니, 음을 가지고 글자에 더해서 일체의 모든 명구와 글 등을 굴려서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첫 장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룬바 일체의 모든 글자는 다 그 근본인 첫 장을 여의지 않기 때문에 ‘모두 첫 장에 거두어진다’고 한 것이다. 넷째, ‘이와 같이’ 이하는 합해서 매듭 지은 것이니, 10지라 하는 것은 첫 장에 합한 것이고 일체의 불법이라 하는 것은 일체의 글자에 합한 것이다.
이상 청함을 마친다.
둘째, ‘그러므로’ 이하는 청함을 매듭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논 가운데 ‘무엇 때문에 다시 거듭해서 청하는가’ 하는 것은 앞에서 이미 거듭 청했으므로 여기서는 이것이 또 거듭되기 때문에 ‘또 거듭해서’라고 한 것이다.
‘의혹(疑惑)’에 둘이 있으니, 첫째, ‘정함이 없는 것’이란 곧 가히 피할 수 있지만, 둘째로 정해진 것은 피할 수 없다. 이것은 정한 것을 기준으로 해서 말했기 때문에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설하지 않으면 허물이 많다’고 한 것을 간략히 네 가지 허물이 있으니, 첫째 정함이 없는 의혹이 있는 중생은 바꾸어 굴려서 믿고 이해함[信解]을 이룰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둘째, 이미 믿고 이해함을 이룬 이는 교법[阿含]의 행을 성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셋째 이미 교법의 행을 성취한 것은, 얻은 이는 깨달음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요, 넷째 깨달음에 들어갈 수 있는 이는 불법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 잃음이 있기 때문에 ‘허물이 많다’고 하였다.
‘일체의 불법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곧 위의 네 가지를 다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래 의심을 해석하는 가운데 먼저 묻기를 “모든 부처님이 힘이 있어서 능히 믿음을 내게 하는데 무엇 때문에 오히려 비방하는 뜻을 일으키는가?”라고 한다면, 이것은 앞의 피할 수 없음을 의지해서 물은 것이다.
이하는 해석이니, 이 가운데 모든 중생에게 두 가지 정함이 있으므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일찍이 이미 결정된 업을 지어서 보를 받음은 필연적인 것임을 일컬어 ‘보를 받음이 정해져 있다’고 이름했다. 숙세에 죄가 마음을 훈습(薰習)하여 반드시 악을 짓게 함으로 ‘업을 지음이 정해 있다’고 이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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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련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3-12 16: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