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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 20권 중 제 11권
화엄경탐현기 제11권
법장(法藏) 지음
김호성 번역
22. 십지품(十地品) ③
넷째,1) 교량승분(校量勝分)이다. 보살이 이2) 중에 머무는 것은 3승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앞의 초주(初住) 및 안주(安住)3)에서 이 미 소승을 초과한다[過]고 설했는데, 무엇 때문에 이곳4)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뛰어나다고 설하는가? 해석해 말한다. 보살의 모든 행이 사(事)라고 한다면, 모두 초과함이다. 앞은 초주 및 정주(正住)의 초과함이고, 여기서는 지위가 가득 차서 뛰어나기 때문에 역시 초과함을 밝히는 것이다. 소승 견도위[見位]의 경우에는 이러한 뛰어난 덕이 없는 것이다. 이제 여기서는 같지 않으므로 뛰어남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뛰어난 모습은 간략히 설하면 세 가지이다. 첫째 원(願)은 뜻이 멀고 넓음을 표방하는 것이고, 둘째 행(行)은 서원에 의지해서 닦음을 이루는 것이며, 셋째 과(果)는 계위의 행이 성취됨에 해당하는 것이다.
첫째 원에 대해서는 간략히 일곱 가지 문(門)으로 나눈다. 첫째 이름을 나타낸다. 둘째 체성(體性)이다. 셋째 닦음을 기준으로 해서 분별한다. 넷째 행을 기준으로 해서 분별한다. 다섯째 구하는 행의 계위를 기준으로 해서 분별한다. 여섯째 인과로 분별한다. 일곱째 본문을 해석함이다.
첫째 이름에 대해서이다. 원이라는 것은 바라고 구한다[希求]는 뜻이다. 『지론(地論)』5)에서는 “모든 큰 원을 발하는 사람은 마음에 따라서 뜻을 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다음에는 개별적인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논 중에는 다만 본문을 해석하고 있을 뿐이며, 이름이 나타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로부터 모든 대덕이 뜻에 의지하여 이름을 지었으나, 어떤 경우는 따를 만하고 어떤 경우는 따를 만하지 못하다. 이제 『양섭론』6)에 의지하여, 열 가지 이름을 갖추어서 열거해 보겠다. 저 『양섭론』에서 말하였다.
“첫째 공양원(供養願)이니, 뛰어난 인연의 복전이 되시는 스승 법주(法主)에게 공양하길 원하는 것이다. 둘째 수지원(受持願)이니, 뛰어난 정법을 수지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셋째 전법륜원(轉法輪願)이니, 대집(大集) 중에서 일찍이 없었던 법륜을 굴리고자 원하는 것이다. 넷째 수행원(修行願)이니, 부처님 말씀과 같이 모든 보살의 올바른 행을 수행하고자 원하는 것이다. 다섯째 성취원(成就願)이니, 이 기세계(器世界) 중생으로 하여금 3승의 선근을 성취토록 하는 것이다. 여섯째 승사원(承事願)이니, 모든 불국토에 왕생하여 모든 부처님을 언제나 뵙고 공경하여 모시며 올바른 법을 듣고자 원하는 것이다. 일곱째 정토원(淨土願)이니, 자신의 국토[自土]를 청정케 하여 정법을 세워서 능히 중생을 수행케 하고자 원하는 것이다. 여덟째 불리원(不離願)이니, 태어나는 곳마다 항상 모든 부처님과 보살을 여의지 않고 뜻과 같이 행함을 얻고자 원하는 것이다. 아홉째 이익원(利益願)이니, 언제나 항상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지어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일이 없도록 원하는 것이다. 열째 정각원(正覺願)이니, 모든 중생과 더불어 똑같이 위없는 깨달음[無上菩提]을 얻어서 언제나 불사(佛事)를 짓고자 원하는 것이다.”7)
해석해서 말한다. 이러한 열 가지 원 중에서 첫 번째는 공양원인데, 이 경 중에서는 오직 부처님만을 공양하는 입장이지만 『섭론(攝論)』8)에서는 다른 뛰어난 스승들의 인연을 모두 다 언급하고 있다. 두 번째는 같다. 세 번째는 이 경 중에서는 법륜을 굴려 주시기를 청하는 것으로 법을 거두어들임에 있어서 으뜸으로 삼고 있는 것일 뿐, 스스로 법륜을 굴리겠다고 하지는 않는다. 네 번째 원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이 “이는 중생들의 마음과 원을 아는 것이다”9)라고 하지만, 이 이름[修行願]은 그렇지 않다. 본문 가운데서 ‘이는 보살행을 닦는 것이다’고 스스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섭론』과 같은 것이다. 다섯 번째에서, ‘성취’는 교화의 의미와 같은 것이다. 여섯 번째는, 이 경 중에서는 세계를 아는 원[知世界願]10)이라 이름하니, 현전에 세계의 차별을 환히 아는 것으로서 『섭론』과 같지 않다.
이러한 두 가지 설11)을 회통(會通)하면, 이른바 저 『섭론』에서 말하는 ‘모신다[承事]’는 것은 반드시 부처님 세계에 왕생해야 하며, 경에서 말하는 ‘세계를 아는 것’ 역시 반드시 부처님을 모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또한 반드시 회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 다만 이 경을 표준으로 삼으면 저 『섭론』의 열 가지 원[十願] 역시 이 경에서 나간 것으로 다시 다른 곳에서는 이와 같은 글이 없기 때문이다. 나머지 뒤의 네 가지 원의 뜻은 모두 같으니,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체성(體性)에 여섯 가지 문(門)이 있다.
첫째, 극성문(剋性門)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유식론』 제9권에서, “욕(欲)․승해(勝解) 및 신(信)으로 성품을 삼는다. 원은 이러한 세 가지를 스스로의 성품으로 삼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둘째, 상응문(相應門)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양섭론』 제10권에서는 “청정과 의욕(意欲)으로써 원의 체로 삼는다. 반야에 의지하기 때문에 청정을 얻으며, 대비에 의지하기 때문에 의욕이 있게 된다”라고 하였다. 풀이하면 여기에는 다섯 가지 법이 있다. 첫째 청정이라는 것은 곧 믿음이다. 둘째, 의욕이라는 것은 곧 의락(意樂)이다. 셋째는 욕(欲), 넷째는 지(智), 다섯째는 비(悲)이다. 뒤의 둘은 의지할 바가 된다. 무엇 때문에 이 둘에 의지하게 되는가? 원에 둘이 있기 때문이다. 『유식』12)에서 “원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이른바 보리를 구하는 원과 중생을 이락(利樂)케 하는 원이다”라고 하였다. 셋째 소의(所依)를 기준으로 한 것이니, 후득지(後得智)에 의지하여서 이러한 원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다른 『논』13)에서는 10도(度:바라밀) 중 뒤의 네 가지가 모두 후득지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넷째, 행이 점차 더해짐을 성품으로 삼는 것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마치 『지론(地論)』14)에서 “무엇 때문에 대원(大願)이라 이름하는가? 광명의 선근이 점점 뛰어나게 되고 더욱 넓어지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다섯째 권속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모든 행에 통하기 때문이다. 『유식』15)에서 “만약 권속을 아우르면 하나하나가 모두 공덕을 두루 다 행함으로써 성품을 삼고 있다”고 하였다. 여섯째 구경(究竟)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양섭론』 제10권에서 “이러한 열 가지 원은 초지(初地)에 오름에 이르러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원은 진여로써 체를 삼으니, 초지에 이르러야 능히 진여를 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셋째, 닦음[修]을 기준으로 해서 분별하는 것이다. 처음의 일곱 가지 원은 닦음의 시작이고, 그 다음 두 가지 원은 닦음의 성숙이며, 마지막 한 가지 원은 닦음이 이루어져서 과보를 얻는 것이다. 또한 10지에 오르기 이전[地前] 처음 발심한 때로부터 곧 이러한 원을 일으켰으며, 초지에 오름에 이르러 비로소 원을 닦아서 이룸을 얻는 것이니, 『양론(梁論)』16) 등에서 밝힌 바와 같다.
넷째 행(行)을 기준으로 해서 분별하는 것에 둘이 있다. 하나는 개별적이고, 둘은 전체적이다.
개별적으로 말하면 처음 두 가지 원은 자리행(自利行)이다. 논17)에서 “첫째 원은 공덕의 행이 가득 찬 것이다. 둘째 원은 지혜의 행이 가득 찬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다음 다섯 가지는 이타행(利他行)이다. 그 중 첫째 원18)에서 ‘어떤 몸으로 하는가?’라고 한다면, 이른바 법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으뜸으로 삼는 몸은 능히 다른 이를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둘째 원19)에서 ‘어떤 마음으로 하는가?’라고 한다면, 수행하는 마음이니 바야흐로 중생을 거두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원20)에서 ‘누가 중생인가?’라고 한다면, 이른바 4생(生) 등이니, 교화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넷째 원21)에서 ‘중생은 어느 곳에 머무는가?’라고 한다면, 세계의 차별을 알기 때문이다. 다섯째 원22)에서 ‘스스로는 어느 곳에 머물면서 능히 중생을 교화하는가?’라고 한다면, 정토에 머물러서이다. 뒤의 세 가지 원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첫 번째 원23)은 자리(自利)가 가득 찬 것이고, 두 번째 원24)은 이타(利他)가 가득 찬 것이며, 마지막 원25)은 자리․이타로 과보를 얻는 것이다. 둘째 세 가지 원 모두 자리이다. 논26)에서 “뒤의 세 가지 원은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셋째 세 가지 원이 모두 이타이다. 논27)에서 “이 세 가지는 여실히 중생을 교화함을 나타내 보여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둘은, 전체적으로 말하면 이 열 가지 원은 모두 자리이기도 하고, 모두 이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아래의 논28)에서 “이렇게 보살의 원이 뛰어나다고 헤아리는 데는 두 가지 점에 있어서 성문․벽지불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다.
첫째는 언제나 한량없는 행을 부지런히 닦아 익히기 때문이고, 둘째는 모든 중생과 더불어 같이 행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해석해서 말하면 여기서 위의 구절은 자리이고 뒤의 구절은 이타이기 때문이니,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29) 구하는 행의 계위[行位]를 기준으로 해서 분별하는 것에 둘이 있다. 하나는 전체적이고, 둘은 개별적이다.
전체적으로 말하면 혹은 모두 행이라고 할 수 있으니, 모두 원에 의지하여 닦는 행이기 때문이다. 혹은 모두 계위[位]라고 할 수 있으니, 처음으로 발하는 것은 지전(地前)이고 마지막으로 이루는 것은 지상(地上)이기 때문이다. 앞의 『양론(梁論)』30)과 같다.
개별적으로 나눈 것 가운데 처음 일곱 가지 원은 행일 따름이니, 앞31)에서 해석한 바와 같다. 뒤의 세 가지 원은 계위를 기준으로 해서 나타낸 것이다. 논32)에서는 뒤의 세 가지 원을 설하고 있는데, 첫째 원33)에 대해서 “지위를 얻었으므로 뛰어나다고 헤아리는 것이다”라고 이름하였다. 이는 초지에서 제9지에 이르기까지 점점 뛰어나기 때문이다. 둘째 원34)에 대해서 “보살지(菩薩地)가 다함을 얻었으므로 뛰어나다고 헤아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제10지 보살의 계위가 다했으므로 ‘보살지가 다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셋째 원35)에 대해서 “모든 지위가 다하여 구경(究竟)을 얻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지위에 있음이니, 부처님의 과보는 궁극적으로 모든 지위를 다하기 때문이다.
여섯째,36) 인과로 분별하는 것 역시 전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이 있다.
전체적으로 말하면 모두 인(因)이니, 인위(因位)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열 번째 원에서 어찌 성불이라 하는가?37) 해석하는 데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이것은 지상 보살의 원력으로서 타방의 성불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지, 이실(理實)로는 부처님이 아니다. 둘째 10지 중에서 원을 일으켜 마땅히 성불할 것을 원하는 것이며, 현재는 아직 성불한 것이 아니다. 혹은 과(果)이기도 한데,38) 지전에 원을 일으켰으나 아직 이루지 못했으면 인이 되지만, 지(地)에 이르러 성취하였으므로 과가 된다. 마치 10바라밀행이 지전에는 인이 되지만, 지상에서는 과가 되는 것과 같다.
개별적으로 말하는 것에도 둘이 있다. 첫째 나타남을 따른다는 말이니, 앞의 아홉 가지 원은 인이고 뒤의 한 가지 원은 과이다. 둘째 갖추어 거두어들인다는 말이니, 앞의 다섯 가지 원은 인행(因行)을 이루는 것이다. 여섯째 원은 세계를 아는 지혜이니, 곧 구하는 종지(種智)로서 과이고, 일곱째 원은 구하는 정토의 의보(依報)이니 과이다. 여덟째와 아홉째 원도 모두 인이고, 열째 원은 구하는 정보(正報)이니 과이다.
일곱째,39) 본문을 해석하는 데에 넷이 있다. 첫째 한 구절은 앞을 맺으면서 뒤를 낳는 것이니 원의 방편을 일으키는 것이고, 둘째는 바로 열 가지 원을 나타내는 것이다. 셋째 널리 권속들을 거두어들이는 것이고, 넷째는 10(十)으로써 유한수[要期]를 다하는 것이며, 그로써 다함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첫째 중에서 ‘이와 같이 정해진 마음[定心]을 낳는다’는 것은, 논에서는 ‘큰 방편’과 ‘큰 행’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이른바 교묘하게 큰 뜻을 일으켜서 짓고자 하는 바를 표방하는 것을 큰 방편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이는 원심(願心)이요, 원에 의지하여 닦으면 행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러므로 큰 행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렇게 원과 행을 이루는 것이다. 이 두 가지에 대하여 작심하여 결정적인 믿음을 이루고 다시 두 가지 생각이 없으므로 ‘정해진 마음’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둘째, 바로 열 가지 원을 나타내는 것은 곧 열 가지 문단[段]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원 중에 모두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짓는 바 일을 드는 것이니, 곧 행의 체(體)이다. 둘째 ‘이러한 큰 원을 발한다’는 것은 행에 상대하여 원을 일으킴을 밝히는 것이다. 셋째 ‘광대하기가……’ 등은 원의 분제(分齊)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들 원을 전체적으로 말하면, 일곱 가지 큼[大]이 있다.40) 첫째 공양하는 마음이 크다[供心大]는 것이니, ‘청정심(淸淨心)’은 논에서 ‘상심신청정(上深信淸淨)’으로 이름하는 것이니, ‘공경하고 존중함을 더욱 더한다’는 것은 ‘상(上)’을 해석한 것이고, ‘보리에 회향한다’는 것은 ‘심(深)’을 해석한 것이며, ‘결정적인 믿음’은 ‘신(信)’을 해석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청정심은 이러한 세 가지 뜻을 모두 다 갖추고 있다. 또한 한결같이 다른 생각으로 잡스럽지 않음을 청정심이라 이름한 것이다. 둘째 복전이 크다[福田大]는 것이니, 이른바 이렇게 공양할 부처님이 있으므로 ‘나머지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공양에는 세 가지가 있다.41) 어떤 사람은 3불(佛)을 공양하는 것에 배대42)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동의할 수 있으며 어떤 경우는 동의할 수 없으니, 이에 준하면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중에 ‘향과 꽃’은 다만 공경을 표하는 것이니, 쓸모가 없으므로 공경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그렇게 공양을 행하는 것과 공경을 행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 하면, 다만 뜻은 하나이나 행이 다를 뿐이다. 수순(隨順)한다는 뜻에서는 공양이면, 삼가 우러른다는 뜻에서는 공경이라 하는 것이다. 또한 3불(佛)에 배대하는 것은 앞에서와 같다. 논에서는 3승에 나아가서 3불을 설하는 것이다. 아래에 준하면, 별교에도 10불(佛)이 있다. 셋째 공양하는 일이 크다[供事大]는 것이니, 이른바 ‘모든 공양구(供養具)’ 등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 모든 일[事事]이 넓다는 것이니, 논에서 말하는 ‘한량없음’과 같다. 둘째 종류가 많은 것이니, 논에서 말하는 ‘갖가지’와 같다. 셋째 모두 정묘(精妙)한 것이니, 논에서 말하는 ‘다시 뛰어난 일 등으로 공양한다’는 것과 같다. 이러한 세 가지 뜻을 갖추었으므로 ‘모든 공양구’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상은 행의 체43)이다. 넷째 원이 큰 것이니[願大], 이른바 행에 따라서 원을 일으키는 것이다. 경에서 말한 ‘이와 같이 큰 원을 일으킨다’와 같다. 그러므로 이는 원을 일으키는 것이다. 다섯째 공덕을 거둠이 큰 것이니[攝功德大], 다른 보통의 선근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광대하기가 법계와 같다’고 한 것이다. 여섯째 인이 큰 것이니[因大], 한량없는 애과(愛果)를 낳아서 인이 다함이 없기 때문에 ‘구경(究竟)에 허공과 같다’고 한 것이다. 일곱째 시간이 큰 것이니[時大], 능히 후제(後際)를 다하여 열반의 항상한 과보를 얻기 때문에 ‘미래제가 다한다’고 한 것이다. 여덟째,44) 서원을 세워 스스로에게 요구하기 때문에 ‘모든 겁 동안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면서도 마침내 쉼이 없다’고 한 것이다. ‘모든 겁 동안의 모든 부처님’은 한꺼번에 공양하는 것[頓供養]이고, ‘쉼이 없다’는 항상 공양하는 것[常供養]이다.
주)---------------------------------------------------------------
1) 장행 중에 넷이 있는데, 그 넷째이다.
2) 10지 중의 초지(初地), 즉 환희지이다.
3) 앞의 초주 및 안주는 장행에 넷이 있는데, 그 첫째 시주지분(始住地分)과 셋째 안주지분(安住地分)을 가리킨다.
4) 장행 중 넷째 교량승분이다.
5) 『십지경론(十地經論)』 제3권. 법장은 「십지품」을 주석함에 있어서 세친에 의한 「십지품」 주석서인 『십지경론』을 아울러 참고하면서 주석하고 있다. 따라서 특별한 언급이 없으면 논은 곧 『십지경론』을 가리킴을 밝혀 둔다.
6) 진제 역 『섭대승론석』 제10권. 다만 다섯째 원을 성숙원(成熟願)이라 이름하였다.
7) 체원(體元)은 이 열 가지 원으로써 의상(義相)의 『백화도량발원문』을 해석하고 있다[체원, 『백화도량발원문약해』(한불전 6권 576하) 참조]. 다만 체원은 네 번째 원을 수행이리원(修行二利願), 다섯 번째 원을 성숙중생원(成熟衆生願), 열 번째 원을 성정각원(成正覺願)이라 이름하였다.
8) 『섭대승론』이다.
9) 『수현기』의 설이다.
10) 경 중에 ‘지세계원(知世界願)’이라는 말이 그대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와 같이 세계를 아는 지혜에 따라 들어오는 것이……’라는 구절이 보일 뿐이다.
11) 세계를 아는 원이라는 경의 말씀과 부처님을 모시고자 하는 『섭대승론』의 입장.
12) 『성유식론』 제9권.
13) 진제 역, 『섭대승론』 제10권.
14) 『십지경론』 제3권.
15) 『성유식론』 제9권.
16) 『양섭론』이다.
17) 『십지경론』 제3권.
18) 전체에서는 세 번째 전법륜원이다.
19) 전체에서는 네 번째 수행원이다.
20) 전체에서는 다섯 번째 성취원이다.
21) 전체에서는 여섯 번째 승사원이다.
22) 전체에서는 일곱 번째 정토원이다.
23) 전체에서는 여덟 번째 불리원이다.
24) 전체에서는 아홉 번째 이익원이다.
25) 전체에서는 열 번째 정각원이다.
26) 『십지경론』 제3권.
27) 상동(上同).
28) 상동(上同).
29) 원의 범주 중에 다섯째이다.
30) 앞의 『양섭론』.
31) ‘닦음을 기준으로 해서 분별하는 것’을 가리킨다.
32) 이하는 모두 『십지경론』 제3권 참조.
33) 전체에서는 여덟 번째 불리원이다.
34) 전체에서는 아홉 번째 이익원을 말한다.
35) 전체에서는 열 번째 정각원이다.
36) 원의 일곱 가지 범주 중 여섯째이다.
37) 정각은 불과이므로 10원이 모두 인이라고 한다면 열 번째 원의 이름을 ‘정각원’이라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냐는 문제 제기이다.
38) 앞의 두 가지 해석은 모두 그러한 문제 제기가 타당하다는 대답이다. 그러나 열 번째 원을 과로 보아서 정각이라 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39) 원의 일곱 가지 범주 중 일곱째이다.
40) 『십지경론』은 여섯 가지 대(大)를 말하고 있으나, 법장은 원대(願大)를 하나 더 추가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경에 근거한 것이다.
41) 『십지경론』에 의하면, 이양공양(利養供養)․공경공양(恭敬供養)․행공양(行供養) 등이다.
42) 『십지의기(十地義記)』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이 셋은 따로 3불에 배대한다. 첫째는 응신, 둘째는 보신, 셋째는 법신에 배대한다’”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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