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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탐현기 제13권
글쓴이 : 백련사 날짜 : 2009-01-13 (화) 11:27 조회 : 2039
화엄경탐현기 제 13권.hwp (126.7K), Down : 65, 2009-01-13 11:2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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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등록일 : 2003-10-22 오후 8:32:00]
제 목 :
화엄경탐현기 제13권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 20권 중 제 13권

화엄경탐현기 제13권

법장 지음

김호성 번역

22. 십지품(十地品) ⑤ 

제6 현전지(現前地)이다. 일곱 가지 문은 앞과 같다.

첫째, 이름을 해석한다[釋名]. 『섭대승론』1)에서는 “연기에 대한 지혜[緣起智]로 말미암아 능히 반야바라밀다를 현전케 하므로 ‘현전지’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세친의 석2)에서는 “이른바 이 지(地) 중에서 연기에 대한 지혜에 머무른다는 것이니, 이러한 지혜의 힘으로 말미암아 분별함이 없는 지혜로 현전함을 얻어서 모든 법에 염정(染淨)이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성(無性) 석3)의 뜻 및 『양섭론』4)은 모두 이러한 설과 같다. 해석해 말하면, 가행지(加行智)로 말미암아 근본지(根本智)를 이끌어서 진여를 증득하여 염정이 없는 법계를 현전케 하기 때문이다. 『해심밀경』5)에서는 “현전에 모든 행이 유전함을 관찰한다”고 하고, 또 “무상(無相)에 대하여 작의(作意)를 많이 닦아서 바야흐로 앞에 나타나게 되어 현전하므로 현전지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해석해 말하면,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현전에 모든 행이 유전함을 관찰하는 것이고, 둘째는 많은 작의로 말 미암아서 무상관(無相觀)으로 하여금 비로소 현전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장엄론』6)에서는 “생사와 열반에 머물지 않으며 관찰의 지혜가 현전하는 것을 현전지라 이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십주론』7)에서는 “마사(魔事)를 항복하였으므로 보살도의 법이 모두 현전한다”고 하였다. 『인왕경』8)에서는 ‘법현(法現)’이라고 이름하였다. 『성유식론』9)은 『섭론』10)과 같으며, 『유가론』11)은 『해심밀경』과 같으며, 『금광명경』12) 등은 다시 다른 설이 없다. 『십지론』 등은 앞에서 밝힌 바와 같다.

둘째, 차례이다. 역시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앞의 계위는 성문에 기탁한 것이며, 여기서는 연각을 밝힌다. 법이 앞의 지위를 넘어섬에 기탁하는 것이므로 그 다음에 오는 것이다. 둘째 4지(地)는 비록 출세간이지만 세간이 능히 따르지 못하는 것이고, 5지(地)는 능히 세간을 따르기는 하지만 염정의 소견을 깨뜨릴 수 없었다. 이 지는 염정이 없는 법계를 관찰하여 그러한 소견을 깨뜨리기 때문에 그 다음에 오는 것이다. 셋째 『성유식론』13)은 말하였다.

“앞의 다섯 가지 지(地)는 유상관(有相觀)이 많고 무상관(無相觀)이 적으며, 제6지에서는 무상관이 많고 유상관이 적으며, 제7지 이상은 순전히 무상관뿐이다.”

이제 이 지는 무상관에 대해서는 물러섬이 적고 들어섬이 많으므로 반드시 그 다음에 오는 것이다.

셋째, 떠나는 장애이다. 『십지론』14)에 의하면, ‘미번뇌습장(微煩惱習障)’이다. 해석해 말하면, 이 계위 중에서는 무상관을 닦음이 많으므로 장애가 이와 어긋나기에 미세한 습기라 설하는 것이다. 또 앞 지의 장애와 대조해 보면 이 지가 미세하다고 말하지만, 이치로는 곧 소지장 중의 구생(俱生)의 일분(一分)인데 미세한 염정을 집착하여 6지(地)의 염정이 없는 법계와는 어긋나므로 장애가 되는 것이다. 진실로 5지는 3지․4지의 염정의 차별적인 계위를 넘어서 있어서 합하여 같은 곳으로 하지만 아직 두 가지 상(相)15)이 다하지 않았는데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제거되므로 미세라고 설하는 것이다. 『성유식론』16)에서 말하였다.

“추상현행장(麤相現行障)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이른바 소지장 중 구생(俱生)의 일분이니 염정의 거친 모습이 현행함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그것은 6지의 염정이 없는 도를 장애하는 것인데 6지에 들어갈 때 문득 능히 영원히 끊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서 6지는 두 가지 어리석음 및 그 추중(麤重)을 끊는 것이라 설한다. 첫째, 현관찰행유전우(現觀察行流轉愚)는 이 지 중에서 염이 있음을 집착하는 것이니 모든 행의 유전(流轉)이 염분(染分)에 거두어지기 때문이다. 둘째, 상다현행우(相多現行愚)는 곧 이 지 중에서 정(淨)이 있음을 집착하는 것이니, 청정하다는 상(相)에 취착하기 때문에 상관(相觀)이 많이 행해지고 아직 오랫동안 무상관(無相觀)에 머무는 것이 능하지 못한 것이다.”

해석해 말하면, 첫째 어리석음은 고․집의 유전문(流轉門)에 집착하는 것이며, 둘째 어리석음은 멸․도의 정상문(淨相門)에 집착하는 것이다. 『금광명경』17)에서는 “첫째는 행법의 상속이 매우 분명하게 현현하는 무명이다. 둘째는 법상(法相)이 자주자주 행해져서 마음에 이르는 무명이다”라고 하였다. 해석해 말하면, 여기서 둘째의 무명은 환멸(還滅)의 정상(淨相)이 자주 마음에 나타나서, 그것이 오래도록 무상관에 위배됨이 많기 때문에 장애가 되는 것이다. 『양섭론』18)․『해심밀경』19) 및 『유가론』20)은 『성유식론』에서 분별하는 것과 같다.

넷째, 증득하는 바[所證]이다. 『섭론』에 의하면 염정이 없는 법계를 증득하는 것이다. 세친의 석21)은 “본래 잡염(雜染)이 없으니 성품에 염오가 없기 때문이며, 이미 잡염이 없을진대 곧 청정도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유식론』22)에서는 “여섯째, 염정이 없는 진여[無染淨眞如]이다. 이른바 이 진여의 본성은 염오가 없으며 또한 가히 설할 수도 없으니, 뒤에야 비로소 청정해진다”고 하였다. 무성의 석23)과 『중변론』24)은 모두 이러한 해석과 같다. 또 『중변론』25)에서는 “이를 요달하므로 말미암아서 연기법이 염오도 없으며 청정도 없음을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섭론』에서는 “이러한 뜻을 잘 앎으로써 제6지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다섯째, 개별적인 행[別行]이다. 10바라밀 중에서는 반야의 행에 해당하며, 이 지(地) 중에서는 연기관(緣起觀)의 증상혜행(增上慧行)이다. 『장엄론』26)에서는 “제6주(住:地)는 염심(染心)을 일으키지 않으니 연기에 의지하여 생을 받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아래 본문에서 찾아보라.

여섯째, 개별적인 과[別果]이다. 『양섭론』27)에서는 “염정이 없는 법계를 통달하면 자타(自他)의 상속에 염오가 없는 과를 얻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금광명경』28)에서는 “6지에서 발심하면 일원광염삼매(日圓光焰三昧)를 얻는다”라고 하였으니, 이 지의 행의 과 및 계위의 과는 본문을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일곱째, 본문을 해석한다. 이 중에 셋으로 나누는 것은 앞과 같다.

첫째, 찬청분(讚請分)이다. 이 중에 열여덟 송을 다섯으로 나눈다. 처음 두 송은 보살이 법을 듣고 공양하고 찬탄하는 것이며, 그 다음 두 송은 모든 천(天)이 환희하여 공양하는 것이고, 그 다음 두 송은 천왕과 권속이 공양하는 것이다. 그 다음 열한 송은 천녀가 노래와 음악으로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처음 두 송은 총체적으로 설함의 이익을 찬탄하는 것이고, 그 다음 세 송은 큰 지혜로 공을 증득함을 찬탄하는 것이다. 그 다음 한 송은 대비로 중생을 거두어들임을 찬탄하는 것이며, 그 다음 네 송은 이치와 행이 걸림 없음을 찬탄하는 것이고, 그 다음 한 송은 천녀가 고요히 침묵하는 것이다. 아래의 한 송은 상수(上首)가 설함을 청하는 것이다.

둘째, 정설분(正說分)이다. 논에서는 앞의 지와 마찬가지로 셋29)으로 나눈다. 다만 첫째만 다를 뿐이니, 이른바 앞의 지에서는 지에 나아가는 방편 및 초주지(初住地)를 똑같이 ‘승만(勝慢)을 대치하는 것’이라 이름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초주지는 머물지 않는 도의 행이 뛰어남[不住道行勝]에 들어가 거두는 것이니, 점점 뛰어나기 때문이다.

첫째, 승만을 대치하는 것은 앞의 5지에서는 4제법(諦法)의 염정의 상을 관하기 때문에 ‘염정을 취착하는 장애’라 이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 가지 평등30)으로써 모든 법의 평등을 총체적으로 관하는 것이다.

본문 중에 셋이 있다. 첫째는 앞을 거듭 들어서 뒤를 일으키는 것이며, 둘째 ‘어떠한 것들이……’ 이하는 바로 10행(行)을 나타내는 것이고, 셋째 ‘이와 같이’ 이하는 행을 맺으며 지에 들어가는 것이다.

바로 10행을 나타내는 중에서 이러한 열 가지 평등31)을 셋으로 나눈다. 처음 여덟 가지는 무로써 유를 깨뜨리는 것이며, 그 다음 하나는 유로써 무를 깨뜨리는 것이고, 뒤의 하나는 유와 무를 함께 깨뜨리는 것이다. 또 이렇게도 해석한다. 처음 하나는 총체적인 것이고, 나머지 아홉은 개별적인 것이다.

앞의 것 중에서 이른바 ‘일체법’은 논에서 ‘12입(入)’을 일체라고 이름하고 있으니, 온(蘊) 중에는 무위법을 거두어들이지 않기 때문이며, 계(界)와 처(處)에서 거두어들여서 다하기 때문에 12처를 기준으로 해서 일체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감각기관[根]․감각대상[塵境]․인식[識] 이들은 모두 세 가지 무성[三無性]을 떠나지 않으니, 그러므로 ‘무성이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논경』에서 ‘무상(無相)’이라 이름한 것은 무성의 상(相)이기 때문이다. 논32)에서는 “22입(入)의 일체법은 자성이 무상(無相)하여 평등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아래 아홉은 개별적인 것인데, 논주는 아홉 가지 모습의 대치를 세워서 무상(無相)을 나타내는 것이다.

처음 한 구절은 12입의 자상이 다만 망상으로 지은 바이며 실로 있는 바가 없음을 밝히는 것이므로 ‘무상(無相)’이라 말한다. 『논경』33)에서 ‘무상(無想)’이라 이름한 것은 저 상(相)이 곧 상(想)34)이기 때문에 ‘무상(無想)’이라 한 것이다. 둘째, 외도가 의심해 말하기를, “이미 취하는 바가 오직 생각뿐이라면, 모습은 공(空)이라 설할 수 있지만 생각은 능히 모습을 나타내므로 생각은 마땅히 유(有)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논35)에서는 ‘염(念)의 전전(展轉)의 행상(行相)’이라고 말하는데, 이른바 염은 생각과 같은 것이다. 뜻을 해석하면, 이러한 상념이 도리어 망상에 의지하여 전전하므로 체가 없는 것임을 밝히는 것이니, 그러므로 ‘무생평등(無生平等)’이라 하는 것이다. 다른 경에서는 “마음을 쫓아서 생각이 생기며, 마음과 더불어 모습을 짓는 것이니, 화합하여 있으면서 함께 생하고 함께 멸하여 모두 머무름[住]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 것이 이를 말함이다. 셋째, 의심해서 말하면, 이미 생각과 모습이 전전하여 서로 의존하는 것이라 설한 것은 곧 모든 법의 생성과 건립이니 어찌 이것이 공(空)이겠는가? 해석해 밝히면, 모습이 생각에 의지하므로 취할 대상은 이루어지지 않고, 생각은 도리어 모습에 의지하므로 취하는 주체는 서지 않는 것이며, 서로 의지하는 것이 둘 다 무너지므로 ‘무성평등(無成平等)’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상은 고제에 미혹한 집착을 깨뜨리는 것이다. 넷째, 의심해 말하면, 괴로움은 생한 바로서 가히 공이라 설할 수 있지만 집제는 능히 생하는 주체이니 어찌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논에서는 ‘염상(染相)’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해석해 밝히면, 미혹과 업은 본래 적정하여 자성을 떠났으므로 평등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 문장36)은 여덟째 구절에 있는데 논에 준하면 마땅히 여기에 있어야 할 것이니, 그러므로 여기에서 분별하는 것이다. 다섯째, 의심해서 말하면, 고․집의 염법(染法)은 가히 공이라고 설할 수 있지만 멸․도의 정법(淨法)은 어찌 유가 아니겠는가? 논37)에서 ‘정상(淨相)’이라 말하였기 때문이다. 해석해 밝히면, 염법이 이미 공이라면 가히 뒤집을 염오가 없어서 청정을 설할 수 없으므로 ‘본래 청정하다’고 설하는 것이다. 이상은 상(相)을 제거하는 것이다. 여섯째, 의심해서 말하면, 만약 염정이 모두 공이라면 곧 마땅히 갖가지 언설(言說)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이미 명언(名言)이 있으므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목적하는 바의 뜻이다. 논에서 말하는 ‘분별의 상’은 명언분별(名言分別)인 것이다. 해석해 말하면, 다만 이름은 뜻에 의지해서 성립되고 뜻은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이다. 저 뜻의 인을 관찰하는 것은 이름의 과를 보지 못하는 것이고, 또한 이름의 과를 관찰하는 것은 뜻의 인을 보지 못하는 것이니, 이러한 세간에는 이름을 얻고 뜻을 얻지 못함도 있고 뜻을 얻고 이름은 못 얻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이름을 찾고 뜻을 취하는 것이 모두 망상․희론(戲論)이므로 ‘희론이 없는 평등’이라 말하는 것임을 알아라. 일곱째, 의심해서 말하면, 만약 염정의 이름과 뜻이 모두 공이라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보살은 염오를 버리고 청정을 구하는가? 이미 취하고 버림이 있다면 어찌 모든 법이 없겠는가? 또 망령된 법이 이미 공이라면 곧 진리는 가히 증득해서 취할 수 있는 것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논에서 ‘출몰의 모습’이라 말한 것은 정법(淨法)을 취할 수 있음을 ‘출(出)’이라 이름하며, 염법(染法)을 버릴 수 있음을 ‘몰(沒)’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해석해 밝히면, 망령된 법은 곧 공이어서 내버릴 수 없는 것이다. 진리는 망령된 생각을 떠나니 취할 수 없으므로 ‘취하고 버림이 없으므로 평등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섭론』38)에서는 “생사에 대하여는 버림도 없고 버리지 않음도 없으며, 열반에 대하여 얻음도 얻지 않음도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유마경』39)에서는 “만약 생사의 성품에 통달한다면 곧 열반이니, 그 중에서 취함도 없으며 버림도 없는 것이 진실로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러한 뜻이다. 여덟째, 의심해서 말하면, 이상에서는 진(眞)과 망(妄)이 있다는 소견을 일으켰으므로 무(無)로써 깨뜨린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두 가지 진리[二諦]를 끊어버리는 것이 마땅히 올바른 이치일 것이다. 논에서는 ‘내가 있지 않다는 상(相)’이라 말하였다.

[문] 이 아(我)는 유(有)가 아닌데 어찌 올바른 이치가 아니겠는가? 무엇 때문에 대치해야 할 모습이라 하는가?

[답] 이는 아(我)가 있지 않다는 상에 집착하여 단멸(斷滅)의 무(無)와 같다고 집착하였으므로 잘못이다.

해석하면, 허깨비와 같은 연기[如幻緣起]는 있음을 장애하는 것이 아니어서 단멸과 같지 않으므로 ‘허깨비와 같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홉째, 의심해 말하면, 아(我)를 앞에서는 유(有)라고 취착하므로 곧 부정하여 무(無)라 하였고 아를 다시 무(無)라고 취착하므로 또다시 ‘허깨비 같은 유’라고 설하였다. 그러므로 아는 이제 역시 유이기도 하고 무이기도 하다고 보는 것이 마땅히 올바른 도리일 것이다. 논40)에서 ‘성괴(成壞)의 모습’이라 하였으니, 성은 유의 모습이며 괴는 무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해석에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앞에서 그대가 아(我)를 유라고 말한 것을 깨뜨리기 위해서 무라고 설한 것이지 법체(法體)가 실제로 무인 것은 아니며, 그대가 무에 집착하고 있음을 깨뜨리기 위해서 유라고 설한 것이지 법체가 유정(有情)과 같아서 유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이치는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므로 ‘유와 무가 둘이 아니므로 평등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我)를 앞에서 무라고 말하였지만 이는 유의 무와 다르지 않으므로 무가 아닌 것이며, 또 아(我)를 앞에서 유라고 설하였지만 이는 무의 유와 다르지 않으므로 유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무를 떠나서 가히 무와 더불어 다른 상대가 될[爲二] 유는 없는 것이며, 유를 떠나서 가히 유와 더불어 다른 상대가 될 무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와 무가 둘이 아니므로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는 유와 무가 모두 부정되므로 둘이 아니라고 이름하는 것이 아니며, 유와 무가 합쳐지므로 둘이 아니라고 이름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총체적으로 유와 무가 없으므로 둘이 아니라고 이름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유는 곧 무이고 무는 곧 유이므로 둘이 아니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주)---------------------------------------------------------------

1) 현장 역, 『섭대승론본』 하권.

2) 세친, 『섭대승론석』 제7권.

3) 무성, 『섭대승론석』 제9권.

4) 진제 역, 『섭대승론석』 제10권.

5) 『해심밀경』 4권에 의하면, 뒤의 인용구는 제7지의 두 가지 어리석음 중 둘째 어리석음에서 나오는 문장이다.

6) 『대승장엄경론』 제13권.

7) 『십주비바사론』 제1권.

8) 『인왕반야바라밀경』 상권.

9) 『성유식론』 제9권.

10) 현장 역, 『섭대승론본』 하권.

11) 『유가사지론』 제78권.

12) 『합부금광명경』 제3권.

13) 『성유식론』 제9권.

14) 『십지경론』 제1권.

15) 염과 정을 분별하는 것이다.

16) 『성유식론』 제9권.

17) 『합부금광명경』 제3권.

18) 진제 역, 『섭대승론석』 제10권.

19) 『해심밀경』 제4권.

20) 『유가사지론』 제78권.

21) 세친, 『섭대승론석』 제7권.

22) 『성유식론』 제10권.

23) 무성, 『섭대승론석』 제7권.

24) 『변중변론』 상권.

25) 상동.

26) 『대승장엄경론』 제13권.

27) 진제 역, 『섭대승론석』 제10권.

28) 『합부금광명경』 제3권.

29) 승만대치(勝慢對治)․부주도행승(不住道行勝)․피과승(彼果勝).

30) 경에서는 무성(無性)․무상(無相)․무생(無生)․무성(無成)․본래청정(本來淸淨)․무희론(無戲論)․불취불사(不取不捨)․이(離)․환몽영향수중월(幻夢影響水中月)․유무불이(有無不二) 평등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십지경론』에서는 무상(無相)․무상(無想)․무생(無生)․무성(無成)․적정(寂靜)․본정(本淨)․무희론(無戲論)․무취사(無取捨)․환몽영향수중월경중상염화(幻夢影響水中月鏡中像焰化)․유무불이(有無不二) 평등이라 하였다.

31) 열 가지 평등에 대한 내용은 60권본 『화엄경』 제25권에 제6지를 설한 게송 다음에 나온다.

32) 『십지경론』 제8권.

33) 상동.

34) 산스크리트 samjña는 ‘상(想)’의 뜻인데 ‘상(相)’으로도 번역되었다. 예컨대 『금강경』과 같은 경우이다. 여기서는 ‘상(相)’은 모습으로, ‘상(想)’은 생각으로 옮긴다.

35) 『십지경론』 제8권.

36) “떠났으므로 일체 법이 평등하다.”

37) 『십지경론』 제8권.

38) 현장 역, 『섭대승론본』 하권.

39) 『유마경』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에서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는 것은 선의(善意)보살의 법문이다.

40) 『십지경론』 제8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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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련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3-12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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