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60권본
해 제
1. 경명과 화엄교주(華嚴敎主) 비로자나불
『화엄경』이라고 하는 경명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줄인 경명이고, 대방광불화엄경은 범어 경명(Mah-vaipulya-buddha-ganda-vyha-stra)을 직역한 『대방광불잡화엄식경(大方廣佛雜華嚴飾經)』에서 잡(雜)자와 식(飾)자의 2자를 줄인 것이다. 그래서 중국 화엄종(華嚴宗)의 삼조(三祖)인 법장(法藏)은 그의 저서『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 1권에서 “『열반경(涅槃經)』이나『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에 의하면 화엄경을 잡화경(雜華經)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이같이 갖추어진 경명에서 이 경이 대방광불(大方光佛)이라고 하는 부처님에 대해서 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엄경과 함께 대승경전의 대표적 경전인『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 법(法)을 설하는 경전임을 경명이 나타내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따라서 흔히 법화경은 법을 설하는 경이고, 화엄경은 부처를 설하는 경이라고 짝을 지어서 말한다.
어떠한 부처님을 설하는가 하면 대방광(大方廣)이라는 말로 형용되는 부처님을 설한다. 여기서 말하는 대(大)는 소(小)에 대한 대가 아니라 상대가 없고 비교할 수 없는 절대의 대(大)로서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을 차지하는 대이다. 그리고 방광(方廣)은 특히 공간적으로 넓은 것을 뜻하며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크기를 말한다. 따라서 대(大)와 방광(方廣)은 같은 뜻으로서 시공(時空)을 초월한 무한대(無限大)를 거듭 강조하고 있다. 또 대(大)는 부처의 체(體)를, 방(方)은 용(用)을, 광(廣)은 체와 용을 합하여 광대함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며, 화엄(華嚴)이라고 하는 말은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하는 것과 같이 보살이 만행(萬行)의 꽃으로 부처의 세계를 장엄하게 장식하는 것을 비유한다고 한다.
왜 이 같은 말로 부처를 형용하는가 하면 부처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방광불은 광대(廣大)한 부처님을 뜻한다. 범부(凡夫)의 지성(知性)이 헤아릴 수 없고 우리가 가진 시간과 공간의 개념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그러한 시공에 한정되지 않는 무한대의 부처님을 설하는 것이 화엄경임을 경명은 말하고 있다.
대체로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하는 경명을 이같이 살펴보면 이 경명은 '온갖 꽃으로 장엄된 크고 크신 부처님을 설하는 경'이라고 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부처님은 어떤 부처님인가 하면 비로자나(毘盧遮那)부처님이다. '비로자나'는 범어 바이로챠나(Vairocana)를 음사(音寫)한 것으로서 '광명이 널리 두루 비춘다[光明遍照]'는 말이다. 그것은 무한한 광명을 말하며, 그러므로 비로자나부처님은 널리 두루 남김 없이 비추는 무한한 광명의 부처님이다. 이 같은 부처님을 설하는 경의 이름이 대방광(大方廣)인 것은 매우 사실적(寫實的)인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법장(法藏)과 중국 화엄종의 제4조(祖)인 징관(澄觀)은 무한한 광명의 부처님인 비로자나부처님을 설하는 대방광불화엄경의 경명의 해석을 통하여 이 경의 종지(宗旨)를 밝히고자 하였다. 이 두 사람은 경명을 법과 비유(比喩)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즉 대방광불(大方廣佛)은 법이며 화엄은 비유라는 것이다. 또 법 중에서 대방광은 깨달은[所證] 이치를, 불(佛)은 깨달은[能證] 사람을 표현한다고 하였다. 전자(前者)는 깨달음의 객체(客體)를, 후자는 깨달음의 주체(主體)를 말한다.
그리고 부처가 깨달은 법은 법계에 다함이 없는 묘리(妙理)이니 생각이나 말을 초월한 것이지만 굳이 말을 빌려 표현한 것이 '대방광'이라고 하였다. 이 때 대(大)는 포함(包含)의 뜻으로서 법의 당체(當體)를, 방(方)은 규범(規範)의 뜻으로서 법이 가진 덕(德)의 작용을 나타내며 광(廣)은 주변(周遍), 즉 모든 곳에 두루 남김 없이 힘이 미친다는 뜻으로서 법의 본체와 그 작용이 보편타당(普遍妥當)함을 나타낸 말이다.
부처란 이러한 법을 깨닫고 몸소 실천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이름이다. 여기에는 법은 사람에게 의지하고 사람은 법에 의지하는, 사람과 법의 일체가 있다. 화엄경에서는 법을 깨닫고 몸소 실천하는 이러한 부처님으로 비로자나부처님이 등장한다. 그래서 비로자나부처님을 화엄경의 교주라고 부르며, 화엄경을 주석(注釋)하는 이들은 비로자나부처님을 삼세간(三世間)에 원융(圓融)하고 십신(十身)을 구족(具足)한 부처님이라고 말한다.
삼세간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계를 뜻하는 기세간(器世間)과 중생세간과 정각(正覺)을 이룬 부처의 세간인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의 셋이다. 그리고 십신이란, 특히 화엄경에서 설하는 열 가지 불신(佛身)으로서 보통은 화엄종의 제2조 지엄(智儼)이 지은『화엄공목장(華嚴孔目章)』이라고 하는 화엄경의 주석서에서 들고 있는 두 가지 십신을 말하는데, 해경(解境)의 십불(十佛)과 행경(行境)의 십불을 말한다. 전자는 60권본(卷本) 화엄경 27권, 후자는 60권본 화엄경 37권에서 각각 설하고 있다. 해경의 해(解)는 깨달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해경의 십불이란 깨달음의 경계에 있는 열 가지 불신(佛身)을 말한다. 이 열 가지 불신으로는 중생신(衆生身)을 비롯해서 중생이 의지해서 사는 국토신(國土身)이 있고 전생의 업보(業報)로서 받은 업보신이 있으며, 성문신(聲聞身)·연각신(緣覺身)이 있고 보살신(菩薩身)·여래신(如來身)·지신(智身)·법신(法身)·허공신(虛空身)이 있다.
이같이 유정(有情)·무정(無情)을 망라해서 깨달음과 거리가 먼 중생까지를 불신(佛身)에 포함시킨 생각은 부처의 입장에서 보면 부처 아닌 것이 없다고 하는 화엄종의 교의(敎義)에서 나온 것이다. 화엄종의 가르침에는 유정(有情)과 무정(無情:非情)이 동시에 성도(成道)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화엄종의 깨달음에는 중생이 존재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은 다 동격(同格)의 부처다. 화엄경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경지를 여기서 볼 수가 있다.
그리고 행경십불(行境十佛)의 행은 수행을 성취한 보살의 실천을 뜻한다. 그러므로 행경의 십불이란 수행을 성취한 보살이 얻은 불신(佛身)을 열 가지 방면에서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화엄종에 의하면 그 열 가지란 첫째 정각(正覺)을 성취하여 열반과 생사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세간(世間)에 안주(安住)하는 무착불(無著佛), 둘째 부처의 원력(願力)이 모든 덕을 낳는 원불(願佛), 셋째 선근(善根)을 유지하여 정각을 이루는 주지불(住持佛),넷째 세간에 출현한 화불(化佛), 다섯째 항상 열반에 머무는 열반불(涅槃佛), 여섯째 모든 법계에 불신이 충만한 법계불(法界佛), 일곱째 중생의 마음이 곧 부처인 심불(心佛), 여덟째 항상 깊은 선정(禪定)에 있으면서도 그에 집착하지 않는 삼매불(三昧佛), 아홉째 변함이 없는 진리를 분명히 알고 그 진리를 본성으로 하는 성불(性佛), 열째 원하는 바에 따라서 교화하고 이익을 베푸는 여의불(如意佛)이다.
화엄경의 교주 비로자나부처님은 이와 같은 법을 갖추고 몸소 실천하는 부처님이다. 이 부처님의 이같이 원만한 인격은 부처가 되기 위하여 오래도록 닦은 온갖 인행(因行)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라고 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에 걸쳐서 닦은 온갖 수행을 온갖 꽃에 비유하고 그 온갖 꽃이 활짝 피어 불과(佛果)를 장엄하고 장식한다는 뜻으로 불화엄(佛華嚴) 또는 불잡화엄식(佛雜華嚴飾)이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경명의 해석은 티베트 역[西藏譯]의 경명,『불화엄(佛華嚴)이라고 이름하는 대방광경(大方廣經)』에서도 살필 수가 있다.
화엄경의 주석가들, 특히 법장과 징관은 위와 같은 해석을 바탕으로 경명을 통한 화엄경의 종지를 다음과 같이 부연해서 설명하고 있다.
비로자나부처님이 갖춘 그와 같은 법과 사람을 묶어서 일체가 되게 하는 것은 행(行)이며, 법계에 다함이 없는 이법(理法)을 깨달은 부처의 지혜로 비추어 드러나게 함으로써 그것을 이상으로 삼는 행은 곧 보살행이라는 것이다. 화엄경에서 설하는 보현(普賢)보살의 행원(行願)이야말로 바로 그것이라고 한다. 80권본 화엄경의 대부분은 이러한 뜻의 행을 시종 강조하고 있는데, 그 행이 끝내 추구하는 것은 깨달음이며 보현은 그 인행을, 비로자나부처님은 과덕(果德)을 대표한다고 한다.
2. 경의 구성 및 성립과 한역(漢譯)
이 같은 경이 언제 설해졌느냐 하면 세존께서 보리수 아래서 정각(正覺)을 이룬 지 14일이 되는 날, 깨달음을 이룬 자리[寶座]에 그대로 앉아서 정각의 내용을 설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목적은 세존으로 하여금 세존이게 하는 대방광불(大方廣佛)을 현현(顯現)하는 데 있다고 한다.
오늘날, 화엄경이라고 불리우는 경은 동진(東晋)의 불타발타라(佛駄跋陀羅)가 번역한 대방광불화엄경 60권 34품(品)이 있고, 당(唐)의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대방광불화엄경 80권 39품과 당의 반야(般若)가 번역한 대방광불화엄경 40권 1품이 있다. 이들은 다 한역으로서 각각 60화엄·80화엄·40화엄이라고 부른다. 이 밖에 지나미트라(Jinamitra) 등이 번역한 45품의 티베트역본[西藏譯本]이 있다. 보통 장역화엄(藏譯華嚴)이라고 부르는 이 티베트역 화엄경의 경명은 앞에서도 말했듯이『불화엄(佛華嚴)이라고 이름하는 대방광경(大方廣經)』이다. 이 네 가지 화엄경 중에 40화엄은 다른 세 가지 화엄경의 마지막 장(章)에 상당하는「입법계품(入法界品)」이 현저하게 증폭(增幅)되고 개정된 것으로서 40권 전체가 '입불가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入不可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의1품으로되어 있어서 화엄경의 완본(完本)으로 볼 수는 없다.
이 40화엄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 화엄경 중, 60화엄은 일곱 곳에서 여덟 번에 걸쳐 설해졌다고 한다. 이것을 칠처팔회(七處八會)라고 한다. 또 80화엄은 일곱 곳에서 아홉 번에 걸쳐 설해졌다 하여 이것을 칠처구회(七處九會)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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