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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윤영해의 경전다시읽기
글쓴이 : 백련사 날짜 : 2009-01-13 (화) 09:21 조회 : 1655
이 름 :
윤영해 [등록일 : 2003-07-14 오전 10:15:00]
제 목 :
불교신문/윤영해의 경전다시읽기

〈이티붓타카, Itivuttaka〉 - 부처님의 육성

‘법을 보는자는 나를 보는자요

나를 보는자는 법을 보는 자이다


〈이티붓타카〉의 내용은 다양하고 풍부하여 어느 하나의 주제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출가는 물론 재가에까지 미치는 중요한 가르침들을 두루 다루고 있지만, 이 경은 결국 수행론과 윤리론으로 집약된다.

“내가 설하는 번뇌를 멸하는 도리는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것은 설하지 않노라.” 부처님은 형이상학 혹은 창조설처럼 입증될 수 없는 공론(空論)이나 희론(戱論)들에 대해서는 논할 필요가 없음을 분명히 하신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해탈을 목적하고 있어 그대로 수행하면 반드시 그 결과를 알 수 있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철학이 아니라 종교이며 부처님은 이론가가 아니라 실용주의자라는 점이 명백해진다.

“비구들이여, 가령 어떤 비구가 내 옷자락을 잡고 내 뒤를 발자국마다 따른다 할지라도, 그가 욕망의 격정을 품고 성난 마음을 품었거나 그릇된 소견을 지니고 게을러서 깨달음이 없다면, 그는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고 나는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왜냐하면 그 비구는 법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며, 법을 보지 못하는 자는 나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는 자요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보는 자이다’라는 그 유명한 대목을 만난다. 부처님은 그리스 사람들이 기대한 ‘형상’이나 히브리 사람들이 간증하는 ‘소리’로는 만날 수 없다. 부처님은 법(法, dharma), 즉 어떠한 하나의 형상이나 소리로 고정될 수 없는 진리다. 진리가 부처님이기에 부처님은 항상 온 세상에 편재하신다. 그러므로 진리를 보는 자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시공을 초월하여 부처님을 본다.

“내가 모든 중생을 관찰하니, 계를 가볍게 여기는 탓으로 악취에 떨어져 윤회를 받고 있다. 이와는 달리, 이 도리를 잘 알아서 길이 계를 마음에 새겨 잊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기필코 불환과(不還果)를 얻어서, 다시는 윤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불교사의 한 때 계율을 가볍게 여기던 때가 있어 그것이 오늘날까지 막대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 초기의 육성은 이처럼 계율에 단호하다. 계율을 지키지 않고서는 해탈은 없다. 우리가 부처님의 후예임을 자처하려면 그분이 제시하신 계율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부처님의 육성을 의지해 살아야 한다.

“이익과 명성에 집착하는 사람들이나 이익과 명성이 없어서 마음이 찌들어 있는 사람들 모두 비참한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명리(名利)를 좇아 불나방처럼 모여들고 스러지는 오늘의 우리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대목이다. 명리를 좇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이 없어 한탄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라는 말씀은 명리의 부질없음에 대한 부처님의 태도가 얼마나 단호한지를 알게 해준다.

〈이티붓타카〉의 가장 큰 의의는 부처님의 육성에 가까운 말씀을 만날 수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경전의 양식을 갖춘 수많은 문헌들 가운데는 양식만을 빌린 후대 제자들의 신앙고백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아는 우리들로서는 그것이 진정한 부처님의 육성이라고 믿는 순간, 그 말씀들 한 마디 한 마디가 소름끼치는 전율로 다가온다.

〈이티붓타카〉가 재가의 윤리를 다루고 있다고 해서, 혹은 부처님 입멸 후 상당한 세월이 흐른 다음에 논란이 된 주제들 즉, 무아윤회론의 문제나 효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이유로 그 성립연대를 훨씬 낮춰 잡으려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은 내용상의 근거들이 초기경전으로서의 이 경전의 권위를 확보해준다.

- 2547년 7월 4일 금요일 불교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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